2006-32. 부족한 것이 있더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2:35-38
설교일시 2006/8/6
오디오파일 s060806.mp3 [574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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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있더냐?
눅22:35-38
(2006/8/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넉넉하다” 하셨다.]

• 기억의 회복
어린이 회관에서부터 국립 극장을 잇는 남산 산책로는 참 호젓합니다. 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정말 마음 편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길입니다. 운동 선수들도 그 길을 달리고, 마라톤을 즐기는 이들도 민망한 복장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길을 달립니다. 그곳에 가면 적지 않은 시각 장애인들을 보게 됩니다. 느긋하게 그곳을 거니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다 흐뭇해집니다. 어느 날 그 길에서 색다른 광경을 보았습니다. 제 앞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짧은 끈을 이어잡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각 장애인의 코스를 안내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각 장애인 마라토너였습니다. 그들을 이어주고 있는 그 짧은 끈은 신뢰의 끈이었고, 진한 우정의 끈이었습니다. 시각 장애인 마라토너가 그 끈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달릴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끈이 있는지요?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뒤를 봐줄 만한 ‘빽’(?)이나 연줄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고 삶이 점점 무의미한 것 같아 절망감에 빠져들 때, 감당하기 어려운 생의 위기가 찾아들 때 우리를 이끌어 줄 그런 정신의 끈이 있는가 말입니다. 때로 아름다운 기억이 그런 끈의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생의 위기가 닥쳐오고, 끈 떨어진 연처럼 외로울 때면 부모님의 무덤가를 찾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를 사랑해주었던 분의 품이 그립기 때문일 겁니다. 그 품에 잠시 머물면서 아름다웠던 과거의 기억을 더듬다보면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1960년의 시인 김수영은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거대한 뿌리> 중에서)고 말했습니다.

기억은 세상에 살면서 조각난 우리의 삶을 하나로 모아주는 소중한 끈입니다. 성경에 ‘기억한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기억하신다’, ‘기억하소서’, ‘기억하라’.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선지자들은 주께서 그 백성을 기억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을 만날 때마다 ‘우리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시편의 시인들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라’고 격려합니다. ‘기억의 회복’이야말로 우리의 살아갈 힘입니다.

• 증오의 시간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실 날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사람들 모두가 소망하는 ‘考終命’(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받을 충격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고아처럼 버려져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제자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35)

뜬금없는 질문에 제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곧 그 충만하던 날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낯선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두려웠지만 명령에 따랐을 때 그들은 자기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사람도 고쳐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앞다투어 먹을 것과 머물 곳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호의의 감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아,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과 만났고, 사랑과 큰 아픔으로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그 아름답던 날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떠올리면서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없었습니다.”

선교비도 없고 비상금도 없고 자기를 지킬만한 수단도 없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이 채워지는 신비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곤 다만 뜨거운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36)

당황스런 말씀입니다. 당신이 이전에 지시하신 것과는 모순이 되는 명령입니다.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버려야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이 이제는 돈주머니를 챙기고 자루를 챙기라 하십니다. 게다가 비폭력 평화운동가이신 예수님이 칼을 사라니요. 이 말은 상황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받으실 고난의 쓴 잔을 제자들도 마셔야 함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이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미움과 적대감을 갖고 제자들을 대할 것이었습니다. 주님 눈에는 그게 보이는 겁니다.

• 두 자루의 칼
주님은 제자들에게 닥쳐올 재난의 시간을 내다보며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뜻으로 ‘칼을 사라’고 말씀하신 걸 겁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박해를 가할 때 무력으로 맞서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닐 겁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바로 이런 점에서 현실적이십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그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길을 찾아 그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필코∼’, 이런 큰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사실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사찰 마당에 가서 찬송가를 불러대는 사람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까? 이슬람 세계 한복판에 가서 기독교인들이 평화 축제를 벌이면 그 땅에 평화가 깃들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까?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말씀을 제자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칼 두 자루를 가져와 주님 앞에 내놓습니다. 주님은 ‘넉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을 향한 가벼운 나무람으로 들어야 합니다. “됐네, 이 사람들아.”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칼 두 자루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길은 칼의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사라고 말씀하시는 그 칼은 무엇일까요? 중세 교회는 이 말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황에게 ‘영적인 검’과 ‘세속적인 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황제의 권한도 교황의 권한에 복속된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런 것일까요? 이 말의 숨은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칼을 사라’는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정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손에 정글칼이 들려있는 것처럼, 우리 손에도 절망을 베어내는 결단의 칼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비온 후에 돋아나는 잡풀처럼 우리 마음에는 절망감과 두려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돋아납니다. 그것을 날마다 잘라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말 겁니다. 믿음은 맺고 끊는 것입니다. 결단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아야 우리는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끈질기게 붙들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에는 두 번째 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머리가 아니라 피와 살 속에 깊이 자리잡으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에 속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4:12)

대장장이가 제 아무리 날카롭게 벼린 칼이라 해도 사람의 혼과 영을 갈라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칼은 우리의 무딘 양심을 찌르고, 위선을 잘라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타락한 존재의 특성은 영적인 둔감함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손에 들려진 칼은 생명을 해치는 ‘殺人劍’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活人劍’입니다. 돈과 권세가 숭상받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사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그 칼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 다시 한번 물음 앞에 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물음 앞에 서있습니다.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주님이 물으시니 곰곰이 돌아봅니다. 힘겨운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가난했던 날도 떠오르고, 외로웠던 날도 떠오르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속이 헛헛했던 때도 떠오릅니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욕망하며 삽니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우리는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잠시 대답을 유보하고 또 다시 생각해봅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도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합니다. 배고픔을 알았기에 한 끼 식사가 고맙습니다. 이별을 경험했기에 오늘의 만남이 귀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삶의 계기로 바라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총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방편이나 든든한 빽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뜻을 알게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이웃들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이어주는 그 끈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날이 다가온다 해도 절망을 자르는 칼과, 말씀의 칼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 물으시는 주님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8월 06일 13시 25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