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3. 악을 선으로 바꾸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50:15 - 21
설교일시 200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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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라
창50:15-21
(2006/8/13)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 형제간의 갈등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사람은 가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첫대목은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 살인자라는 사실은 인간 역사가 형제간의 갈등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형제들 간의 갈등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 이야기가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하는 인정 투쟁이든, 아버지의 권한을 물려받으려는 권력 투쟁이든,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한 싸움이든, 그것은 대개 심각한 분열로 끝이 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도 권력 투쟁이 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동물들도 힘겨루기를 통해 서열을 정합니다. 한번 확립된 서열의 질서를 깨뜨리려 자가 나타나면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런 싸움을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동물들은 어찌하든지 후손을 퍼뜨리려고 노력합니다. 적자생존을 통해서 가장 우수하고 힘센 놈이 종자를 퍼뜨려야 그 동물종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의 싸움은 어쩌면 유전자의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부 동물들이 보이는 부정과 모정은 눈물겹습니다. 어느 동물이 종이 다른 동물에게 젖을 물리는 일도 간혹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누가 뭐라 해도 남을 배려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어려움에 처하면 돌보려는 측은지심이 있고, 남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두려는 사양지심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의 본 바탕은 죄와 욕심의 구름에 덮이고 말았습니다. 이게 타락입니다. 무감각해진 겁니다.

약자를 돌보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율법정신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사회란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이 수치심을 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홀거 하이데라는 독일의 경제학자는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과정을 설명하면서, ‘공격자’에 대한 숭배심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어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약자들이나 패배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내면화하고, 강자들과 승리자에 대한 선망의 감정을 마음깊이 길러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승리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약자를 깔보는 성향이 강하졌습니다. 그러니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해야 합니다. <회전의자>라는 노래 기억하시나요? “빙글빙글 도는 의자/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앉으면 주인인 걸” 계속해서 노래는 사람 없이 비워둔 의자는 없다기에,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고 말합니다. 결론이 뭔가요?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입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가 “현대 사회의 우상은 출세”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출세를 위해 달려가느라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까운 이들의 신음소리를 못 들은 체 했습니다. 그래서 성품이 모질어지고, 하나님이 주신 본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재산 다툼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에 서는 일은 보통이고,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얼마나 죄의 유혹에 취약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가인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

• 약자와 강자의 전복
오늘의 본문은 인류의 역사에서 유구한 형제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제들은 坐不安席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동생 요셉을 미디안의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과거의 죄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은 자기들의 동생이기는 하지만, 이집트의 총리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요셉이 자기들에게 앙갚음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 지어낸 아버지의 유언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아버지와 하나님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듣고서 울었습니다. 자기 마음을 아직 헤아리지 못하는 형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기가 막히게 살아온 자기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렇습니다. 언제 처지가 뒤바뀌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군에 입대했을 때 16주 훈련의 막바지에 우리는 성남에 있는 행정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미 소위로 임관한 장교 중에는 후보생 마크를 달고 다니는 우리들을 보고 제법 눈을 부라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그 관계가 역전되었습니다. 훈련 종료와 함께 우리가 중위 혹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자 당황하며 인사를 하던 그들의 표정이 떠오릅니다. 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늘 남의 입장에 서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우가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도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창42:21). 그런데 그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처지가 바뀐 것입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고, 칼을 보면 휘두르고 싶은 게 사람입니다. 힘이 있으면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게 사람의 고약한 본성 같습니다. 성숙함이란 결코 무력하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억압하지 않는 영혼의 능력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정말 잘 사는 것이란 물질적인 풍요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하게 산다는 게 뭐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성품을 따라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신다면 그것은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마음으로 산다면 힘이 있다 하여 우쭐거릴 것도 없고, 힘이 없다 하여 비굴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를 잘 살면 됩니다.

• 부끄러움 직면하기
요셉은 훌륭한 삶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입니다. 눈물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형편없는 바이올린으로도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내는 대가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의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가지고도 훌륭한 삶을 빚어내실 수 있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요셉은 이미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내려놓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 우리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것,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는 것, 우리를 붙잡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요? 우리 마음의 주파수를 미움과 증오에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과 정의와 친절에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덮어두지 않고 오히려 드러냅니다. 상처는 덮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갈등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빠른 해결이 곧 바른 해결은 아닙니다(A "Quick Fix" is not the Answer). 갈등이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은 죄의 참회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의식과 교양과 체면의 문턱을 넘어 무의식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의 저편에 숨겨져 있던 부끄러움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는 자는 울게 마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8-7)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갔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 죄를 우리 눈앞에 갔다 세워 놓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죄를 미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칠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모습을 몰래 찍어서 아이에게 보여주면 아이는 자기의 미운 짓에 충격을 받는답니다. 그 후부터 아이는 달라집니다.

•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자손들까지 돌보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알게 되는 순간 그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니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게 효도의 으뜸인 줄을 알겠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질시를 거두고, 함께 웃고 함께 울 때 어느 부모라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미움과 갈등을 넘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가슴을 치고 계실 것입니다. 전쟁과 테러가 하나님의 가슴을 찢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욕당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 신앙은 복잡한 관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생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함부로 대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이 모욕 받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힘이 있다 하여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바꾸려면 자꾸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동요 <고향의 봄>이 생각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속에서 놀던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일렁이는 버릇이 든 물을 고치려면 바다로 돌려보내야 하듯이, 거칠어진 마음을 고치려면 하나님께로 자꾸 돌이켜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조금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8.15 해방 61주년이 곧 다가옵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부터라도 악을 선으로 바꾸려는 소망을 품고 사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8월 13일 12시 18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