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4. 축복의 사명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12:14-18
설교일시 200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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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사명
롬12:14-18
(2006/8/20)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 가장 귀한 직분
세상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합니다만, 그런 말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뿐이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직업에 대한 귀천의 판단이 엄연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士農工商의 순서로 직업이 서열화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남들 눈에 근사해 보이는 일도 있지만, 누구나 기피하는 일도 있습니다. 3D 업종이 그런 것일 겁니다. 위험하고 어렵고 더러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환경 미화원들이 하루만 파업을 해도 도시는 온통 쓰레기더미로 변하고 말 겁니다. 건강한 사회란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그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가 아닐까요?

직업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세상에는 가장 귀한 직분이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그 직분을 얻기 위해서 남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축복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축복한다는 말은 물론 ‘복을 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겁니다. 축복을 자기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생은 아름답습니다. 축복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소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정말 불쌍한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고 모함하는 사람을 축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축복의 범주가 악한 사람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14)

물론 이 말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축복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사도는 이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게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카타르시스 이후에 찾아오는 자기 모멸감도 있습니다. 함정을 판 사람이 그 함정에 빠진다는 말이 있듯이, 미움의 감정은 올무가 되어 우리를 묶어버립니다. 미움과 저주는 영혼의 무게를 가중시킬 뿐입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어려운 일을 겪거나 부당하게 거친 대접을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만심 아닌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참사람으로 거듭날 소질이 없다면 그런 일을 겪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루미 짓고 이현주 풀어 엮음,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중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면 속상해 하지만 말고, 그걸 자기 초극의 길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일 겁니다. 결국 박해자는 자신의 무지함으로 나의 성숙을 돕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복을 빌어주자는 것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누군가가 나를 칼로 찌르거든 그 칼을 뽑아서 옷에 피를 닦은 후에 공손하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씀 같지만, 그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축복을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머리의 사람이 아니라 가슴의 사람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가슴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며 참 안됐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가슴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15)

이게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이 내 몫이 아니라는 사실이 속상하고, 우는 사람을 보면 외면하고 싶어하지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자아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는 한 우리는 가슴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청년들과 함께 수해 복구 지원활동을 다녀왔습니다. 모든 청년들이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참 흐뭇했습니다. 밭의 잡풀들을 제거하고, 무너진 둑을 보수하고, 밀려온 토사를 치워내고, 무너진 집터를 고르는 일 등 쉽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저는 지금 두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거친 물살에 떠내려가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40대 부부의 집터를 고르는 작업을 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밭 둔덕에서 흙을 파내 새롭게 만드는 집터에 흩뿌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거의 쉬지도 않고 열심히 삽질을 했습니다. 기특한 생각이 들어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좀 쉬엄쉬엄 하지”라고 말했더니 그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그 청년은 희망을 잃고 있는 그 부부의 마음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고은숙입니다.

또 다른 청년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장성호 씨의 후배로 전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27살의 청년입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의 청년 수련회가 같은 기간에 있었지만 그는 수해 복구 작업을 하는 우리 팀에 합류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 교회 청년 수련회 일정 가운데 있는 래프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로 상처를 입은 이들 눈앞에서 물놀이를 하는 게 마땅치 않아서요.” 저는 그 말에 감동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진 청년이기에 그는 정말 열심히 땀흘려 일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성도입니다. 정말 자기 이름 값을 톡톡히 해내는 청년이었습니다. ‘聖徒’란 바로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수해를 만난 분들에게 우리의 땀 흘림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들 곁에 머물렀던 시간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 기쁨의 샘물 한 줄기가 흐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들 속에 가장 귀한 선물을 숨겨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번 일에 동참한 이들은 그 아름다운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
축복을 사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아지려는 마음, 교만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보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입니다. 어느 분은 자기 능력의 70% 정도를 사용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삶에 여유가 생기고,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 局量은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이들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억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선망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돈을 쓰고, 부끄러운 불법을 자행하는 종교인들을 보면 씁쓸합니다. 정국 현안을 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명망을 바탕으로 해서 소위 말하는 ‘New Right’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의기투합했지만 곧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남의 밑에서는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의 마음은 물을 닮았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기쁨을 되찾도록 도우셨고,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셨습니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老子) 누가 부자입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밀리고 밀려 낮은 자리에 서게 되면 마음에 한이 남습니다. 하지만 힘이 있지만 사랑 때문에 기꺼이 낮은 자리를 택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늘의 평안이 깃듭니다. 개역성경에서 ‘낮은 데 처하며’라고 번역한 16절의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 곁으로 다가서는 이들의 영혼은 맑습니다. 정순재 신부의 연작 사진 모음집 <<人曲>>을 보다가 저는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수도자란 그 누구인가, 높이지 않으며, 떠벌리지 않으며, 앞세우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며, 얕보지 않으며, 굽히지 않으며, 숨길 것 없으며, 탐할 것 없으며, 꾀부리지 않으며, 불 꺼진 방에 한 점 빛이고자, 밀알처럼 썩는 아픔과 기쁨을 누리고자 오직 이름 없이 살기를 원한다. 진실로 죄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이고자, 남을 복되게 하여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떠나간다. 어디로 갈는지 아무도 내일의 일을 모른다.”

수도자의 모습이 이러해야 할 것이고, 성도라 지칭되는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불 꺼진 방에 한 점 빛’이고자 하는 사람, ‘죄지은 이의 짐을 지고 가는 지게’이고자 하는 사람, ‘남을 복되게 하여 놓고 맨 나중에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소명은 축복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늘의 복을 나르는 사람이 될 희망을 품고 산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기적의 연속일 것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눈물의 자리, 아픔의 자리에 다가서십시오. 그곳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영혼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축복의 노래를 불러 세상을 아름답게 밝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8월 20일 12시 13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