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5. 이제 일어나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2:1-8
설교일시 2006/08/27
오디오파일 s060827.mp3 [7214 KBytes]
목록

이제 일어나소서
시12:1-8
(2006/8/27)

[주님, 도와주십시오. 신실한 사람도 끊어지고, 진실한 사람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거짓말을 해대며,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서 말합니다. 주님은, 간사한 모든 입술과 큰소리 치는 모든 혀를 끊으실 것이다. 비록 그들이 말하기를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은 우리의 재산, 누가 우리의 주인이랴" 하여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겠다.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 주의 말씀은 흠 없는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금이다. 주님, 주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
어떤 사람이 가로등 불빛을 의지하여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무얼 찾냐고 묻자, 바늘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불빛이 미치는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바늘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게 분명합니까?” 그러자 그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아니오, 집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나그네가 “그렇다면 왜 안에서 찾지 않고 여기서 찾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곳이 환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경우를 刻舟求劍이라고 합니다. 바다에 칼을 빠뜨리고는 뱃전에다가 위치를 표시해둔다는 말이겠습니다. 문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할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요?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때묻은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마음은 변색된지 오래입니다. 좀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네/해 저문 거릴 비추는 가로등/하얗게 피었네.” 김창완 씨가 보컬로 있는 산울림이 부른 이 노랫말이 이렇게 처연하게 들릴 줄은 30년 전 이 노래가 나왔을 무렵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엉뚱한 데서 찾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무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산다는 겁니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까요. 죄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건네오신 말씀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세상에 등 떠밀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현대인을 가리켜 ‘메시지를 잃어버린 메신저’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기는 했는데,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격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또 우리가 원본(original)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복사본(copy)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타락시킨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나의 있음이 곧 사랑 때문임을 잊은 채 살아가기에 우리는 쓸쓸합니다.

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신뢰를 들고 싶습니다. 우리 삶이 피곤한 건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누구 말이든 곧이 듣는 사람을 보면 ‘순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속뜻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뭐든 의심하고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악하고 잇속에 재빠른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정치인들이 뭐라 변명하건 국민들은 <바다 이야기>라는 사행성 도박 사업에서 뭔가 악취를 맡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한 가지 공헌한 것이 있다면 누구의 말도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국민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준 것입니다. 참 뭣 같은 공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현실과 신앙적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문법대로 사는 것이 편한 데, 신앙적 양심은 그러면 안 된다고 책망합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11:3) 사람살이의 기초는 신뢰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이치가 무너지면 우리 삶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 누가 우리를 이기리요?
오늘의 시인은 자기 시대를 한 마디로 “신실한 사람도 끊어지고, 진실한 사람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信’의 열매(實)와 ‘眞’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허울뿐인 사람, 껍데기 사람입니다. 말과 행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고, 참을 추구하느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살아있는 혼이 사라진 세상, 그런 이들이 오히려 요령부득의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세상은 장망성(將亡城), 곧 장차 망할 도성입니다. 아니, 이미 몰락이 시작된 사회입니다. 왕과 지도층들의 잘못을 꾸짖는 예언 정신, 잘못을 끝끝내 잘못으로 드러내면서 권세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는 선비 정신이 사라진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18:8b) 시인은 계속해서 자기 시대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거짓말을 해대며,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서 말합니다.”(2)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습니다.”(8)

인류 역사상 아첨이라는 것은 늘 효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이 경박한 수단이 통하는 까닭은 사람들은 자기가 아첨을 들을 만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느끼는 쾌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잠언은 칭찬으로 사람됨을 달아볼 수 있다(27:21b)고 말합니다. 헛된 칭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소인배일 겁니다. 자기가 한 일보다 더 높은 평판을 얻는 것이 인생의 화(禍)랍니다. 시인이 사는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도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아첨할 줄 모르는 사람, 조직의 생리에 적응할 줄 모르는 야성의 인간,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은 늘 소외당합니다. 저는 요즘 예언자 정신을 강조하는 신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땡감처럼 단단한 사람은 쫓겨나고, 적응의 명수들이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작고한 시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라는 시에서 너무나 작아진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데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그는 자기의 옹졸한 전통은 유구하다고 말하면서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絶頂 위에서는 서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저는 이 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낍니다. 이게 내 모습이지 싶어서입니다. 원주에 사시던 장일순 선생님은 자기의 호를 ‘一粟子’라고 했습니다. 한 알의 좁쌀이란 뜻입니다. 그분이 그렇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아픔으로 여기지 않는 둔감함입니다. 우리가 본래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편안함에 길들여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절 한 번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했던 사탄은 지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승리는 확정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 주님은 말씀하신다
비열한 자들은 말합니다. “혀는 나의 힘, 입술은 우리의 재산, 누가 우리를 이기리요”(4).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5)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역사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염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거 맞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살피시며, 주님의 귀는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시34:15, 19)

저는 이 말씀을 확고히 믿습니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열한 자들의 ‘누가 우리를 이기리요’라는 큰소리에 대해 주님은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한비야 씨가 아프가니스탄에 갔을 때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네들, 이모하고 약속할 게 있다. 너희들 전쟁 끝날 때까지 죽으면 죽을 줄 알어.” 5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깜짝 놀라면서 기쁜 얼굴로 “발레요(알았어요)” 하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했습니다. “너희들 천 원짜리로 고칠 수 있는 탈수, 설사병, 그런 허접한 병으로 죽으면 죽을 줄 알어.”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알았다고 하는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런데 지뢰를 밟아서 팔다리가 잘린 한 아이가 목발을 짚은 채 한비야에게 다가와 빵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 빵은 그 아이가 언제 다시 마련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잠깐 동안 그 빵을 아이에게 돌려줄까, 기쁘게 먹어줌으로써 친구가 되었다는 걸 보여줄까 망설이다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환히 웃어주었습니다. 한비야는 그날 난민 아이들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막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폭력이 더 이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척박한 땅에 희망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멍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7)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의 도움을 받게 마련입니다. 돈이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인맥이 우리의 피난처일 수 없습니다. 높은 지위도 만세반석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장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도를 바치면서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하나님, 미움과 폭력 그리고 돌려세움이 우리의 무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주십시오.” 바른 일을 하는 사람도 미움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오늘까지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작품전에서 제가 가장 오랫동안 주목한 작품은 ‘미제레레’라는 판화 연작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그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들입니다. 흑백으로 찍은 동판화 작품에 붙인 제목이 루오의 관심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정의로운 자는, 백단나무 향처럼, 그를 후려치는 도끼를 향기롭게 한다’, ‘마음이 숭고할수록 목은 덜 뻣뻣하다’,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뿌리는 것’. 그는 미움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는 겁니다. 지난 주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직분은 축복하는 것이라 했지요. 오늘은 달리 말합니다.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것입니다. 이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8월 27일 12시 20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