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6. 기도(祈禱)는 기도(企圖)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21:18-22
설교일시 2006/09/03
오디오파일 s060903.mp3 [682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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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禱는 企圖다
마21:18-22
(2006/9/3)

[새벽에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데,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말하였다.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버렸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 착한 목자에서 판토크라토르로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한 청년과 대화 중에 자기는 한번도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밑바닥 사람들의 땀내나는 삶의 자리에 머무셨던 예수님을 높은 자리에 모셔두고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 기독교의 선교는 주로 테베레 강변이나 로마 시내 외곽의 아피아 가도 부근에 거주하던 하층민들 사이에서 진행되었고, 이들이 은밀하게 모일 수 있는 안전한 장소는 로마 진입로에 위치한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베(catacombe)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극복한 영생을 갈망했고, 종말론적인 소망을 품었습니다. 지금도 카타콤베에 가면 그들이 남겨놓은 여러 가지 신앙적 상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Iesous Christos Theou Huios Solter,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배(내세를 향한 영혼의 항해), 빵, 포도 넝쿨(약속의 땅), 비둘기(성령), 어린 양, 올리브 나뭇가지 등의 이미지가 그것입니다. 카타콤베 내부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대개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런 이미지가 제단에 바칠 희생 제물을 메고 가는 이교도적인 풍습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박애’, 즉 ‘착한 목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는 이제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일로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미지도 황실의 위엄에 맞추어 권위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 상은 위엄있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후광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도 커다랗게 그려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배려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는 예배당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상을 판토크라토르라고 하는데,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교회 역사를 통해서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서 떠나 높은 곳으로 올리워졌습니다.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신의 대리자로서의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려 한 것입니다.


• 너무나 인간적인
하지만 성경이 그려 보여주는 예수님상(像)은 철저히 인간적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대목을 볼 때마다 적잖이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요11:33, 38). 사마리아 성을 지나갈 때는 먼 행로에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아 여인에게 물 한 잔을 청하기도 하셨습니다(요4:6).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마태는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지금도 우리 곁에 오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시던 예수님은 ‘시장하셔서’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습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든 나는 주님의 배고프심에 마음이 갑니다. 주님도 슬퍼할 때가 있고, 주님도 피로할 때가 있고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도 화를 낼 때가 있고, 배고픔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초월의 세계에 계시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비근한 일상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겁니다.

본문은 당신 삶이 경각에 달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시장하신 주님은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지만 잎사귀 밖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탄식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나무는 곧 시들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십니까? 금방까지 푸른 빛을 자랑하던 나무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곧 시들어버립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버렸을까?”를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에 눈이 멀어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언적 사건이었습니다.

• 수정(受精)된 마음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 당시 유대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허울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스스로의 경건 행위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마23:23). 때로는 기도, 금식, 구제 등 종교적인 실천조차 아집에서 비롯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런 이들의 특색은 내면이 평화롭지 못하고 배타적입니다. 그들은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랑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남에 대한 판단과 두려움으로 무장한 종교는 타락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형식만 남은 유대교의 종말을 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불과 40년 후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 멸망으로 나타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해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가 가리키는 바는 바로 그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여름내 교회 마당가 화단에 봉숭아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장마가 그친 뒤에 보니까 그 줄기가 가히 장닭의 다리를 능가할 정도로 튼튼합니다. 얼마 후면 분홍색 꽃이 피겠거니 했는데, 여름이 다가도록 한 송이도 피워내질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나와보니 집사님이 낫으로 그 밑동을 쳐버렸더군요.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 열매를 맺지 않는 식물은 그처럼 천대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신앙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수정(受精)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정’이란 단어는 생명, 마음을 뜻하는 동시에 물질의 정수(精髓)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spirit’, 곧 ‘영’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자꾸 외국어를 말하게 됩니다만 독일어의 엠팡엔empfangen은 받아들인다는 뜻과 임신한다는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임신하게 되는데, 바울 사도는 그것을 아홉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인내와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가 그것입니다(갈5:22-23a).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이런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기뻐하는지, 화를 내야 마땅한 것 같은 순간에도 친절함을 잃지 않고 있는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데도 절제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 기도는 기도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놀라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엉뚱하게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갑작스런 전환은 무엇 때문일까요? ‘열매’라는 단어가 그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야 할 제자들이 열매 없는 자들로 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이나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지금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도는 열매를 임신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도가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해도 죽은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비추어 우리 마음을 조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상호 내주(相互 內住)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이것이 기도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처지를 알아줄 때 인생의 문제는 풀리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기도(祈禱)는 기도(企圖, 일을 꾸며내려고 꾀함)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고 구하는 바를 지금 여기에서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기도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남북간의 교류가 활발하지만 불과 십오륙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단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미친 사람 소리를 들으면서 남북을 오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꿈이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냈습니다. 가난하여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아파도 병원을 찾기 어려운 이주 노동자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에 지핀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분들을 돌보기 위한 무료 진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이게 산을 옮기는 믿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지방에 계시는 장병호 목사님도 교도소에 수감된 채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교정 병원 설립 운동에 나섰습니다. 잘 계산이 나오지 않는 큰 꿈이지만 그는 기도하며 그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삶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15: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 안에 머물 때 우리는 그런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장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셔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시장하신 주님께 달디단 열매를 기쁘게 내드릴 수 있을 때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을이면 초가 지붕 위에 주렁주렁 매달리던 박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광경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런 열매로 풍성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9월 03일 12시 14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