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7. 아나니아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9:10-19
설교일시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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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
행9:10-19
(2006/9/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많이 끼쳤는지를,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니,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 길 안내자
수피즘(sufism)은 이슬람의 신비주의운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랍어로 수피즘에 해당하는 단어는 타리카(tariqah)인데, 그 뜻은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있는 도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리카는 사막에서 오아시스에서 다른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길이라 할 수 없는 길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사람의 흔적을 지우곤 하는 것이 사막입니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는 생명입니다.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서는 그 길에 익숙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영적 스승이란 영혼이 가는 길에 이미 익숙해져서 어디에 함정이 있고 어디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서 성도들은 ‘그 도를 믿는 사람’(행9:2)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도’는 ‘길’을 의미하니까, 성도란 예수를 길로 삼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잘 걷고 계십니까?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우리는 요리책만 들여다보면서 정작 음식은 만들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삶의 여정 가운데서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차에다가 네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더군요. 일단 목적지의 주소를 입력하면 그때부터 기계가 가야 할 곳을 안내해줍니다. 딴 짓을 하다가 길을 놓쳐도 걱정 없습니다. 기계는 새로운 경로를 계산해 길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는 이런 네비게이션이 없나요? 인생은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가야 할 길을 잘 가늠해보고 결국은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간혹 판단이 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합니다. 다마스쿠스의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던 사울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에게 삶은 명명백백했고, 가야 할 길 또한 분명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남다른 열정에 사로잡혔던 청년 사울,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예수라는 사나이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도 입회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마스쿠스에 머물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들이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외곽인 다라야(Darayya)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어떤 초월적인 빛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공포와 전율이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엉겁결에 묻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사울의 이 만남은 신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살기등등하던 사울이 사람들의 손을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철저히 무력해졌습니다. 전혀 예기치도 않았던 삶의 변전이었습니다. 저는 사울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을 그가 만난 영혼의 어둔 밤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 어둔 밤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아집, 욕망, 집착, 지식이 다 무의미해지는 경험입니다. 초월적인 큰 빛 앞에 서자 그가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자부심,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다 무의미해졌습니다. 이것을 터전이 흔들리는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했던 길이 느닷없이 사라지고 생이 혼돈 속에 빠진 셈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한시적 실명 체험의 내적인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는 길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상상력
아나니아가 바로 그 길 안내자였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형성된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사건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박해의 검은 그림자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도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박해자의 맨 앞에 서있는 이가 사울이라는 젊은이임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환상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일어나서 ‘곧은 길’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11-12)

정말 뜻밖의 소식이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람과 만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소명을 회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울에 대해 들은 소문을 주님께 아룁니다. 그가 얼마나 흉포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 때문에 다마스쿠스에 왔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나니아를 재촉합니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려고 한다.”(15-16)

주님은 당신을 훼방하는 데 앞장선 사울을 오히려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놀라운 상상력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도 길을 내시고, 광야의 반석에서도 물이 솟게 하십니다. 골고다의 언덕을 영원한 생명의 현관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니 박해자 사울에게서 충성스런 전도자를 보아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지만, 하나님께는 모두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한 눈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새로운 역사의 초석으로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솜씨 좋은 목공이 길가에 버려진 나무토막을 다듬어 예술품을 만들 듯이 주님은 사울을 다듬어 당신의 그릇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 열정의 방향 전환
아나니아는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사울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비록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대해 ‘아멘!’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은 적을 목전에 둔 길갈에서 전투에 나설 젊은이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여호수아5장). 전투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 그렇게 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던 기드온은 군인들이 너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처음엔 이천 명을, 그리고 그 다음엔 만 명을 돌려보내고 오직 삼백 명만 데리고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둡니다(사사기7장).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아나니아는 ‘곧은 거리’에 있던 유다의 집을 찾아가 사울과 만납니다. 그는 자기가 찾아온 까닭을 밝힙니다. 그는 인생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사울에게 새벽빛을 열어주기 위해 온 것입니다. 사울이 경험하고 있는 어둔 밤의 체험은 오히려 그의 생을 바로 세우기 위한 창조적 혼돈임을 아나니아는 깨우쳐 줍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맹목적 열정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눈 먼 자의 행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릇된 열정을 변화시켜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변화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몸에 손을 얹고 말합니다.

“사울 형제, 형제가 오는 도중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7)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 형제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아델포스(adelphos)인데, 이 말은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델푸스(delphus)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골육지친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사울도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자궁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몸에 닿은 아나니아의 손길은 어쩌면 주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릇된 열정의 비늘, 편견과 경쟁심의 비늘, 자기 의라는 비늘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본다는 말인 아나블레포(anablepo)는 ‘우러러 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제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에서 벗어나자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세상을 감격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의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미움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습니다. 궁극적인 평안과 기쁨이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 우리 삶의 아나니아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하나니아(Hananiah)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교회사에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베드로나,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빌립의 명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한 사람이 어둔 밤으로 걸어 나와 빛 앞에 당도했고,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빛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많은 아나니아들을 만납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우리 삶에 다가와 빛을 던져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가장 절망스런 처지에 빠졌을 때, 모두가 등을 돌린 순간에도 끝까지 우리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에 기운 것 같아 우리 마음조차 팍팍해질 때, 우리 가슴에 따뜻한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준 이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이들의 모습이나 음성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인생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어디선가 아나니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존재로 우리의 갈 길을 밝혀줍니다. 어쩌면 우리들 자신이 아나니아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드러낼 때 우리는 이미 아나니아입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인 아나니아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아나니아가 되어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 신앙 공동체와의 교제를 통해 사랑의 모험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영혼의 용광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9월 10일 12시 11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