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8.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전1:13-21
설교일시 2006/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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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벧전1:13-21
(2006/9/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예수님과 만나서 베드로는 행복했을까요? 배 부르고 등 따순 것을 행복으로 본다면 그는 불행한 생을 살았습니다. 늘 이곳저곳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던 꿈이 좌절되는 아픔도 맛보았고, 결국은 처형 당하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고, 인생이란 더 큰 생명을 향한 순례라고 믿는 사람들은 좀 달리 생각할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만나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로부터 해방되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감옥 속에 갇혀 삽니다. 종신수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순간 감옥 문을 열고 나와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해방을 경험합니다. 과거의 죄로부터도 해방되고 미래에 대한 염려로부터도 해방됩니다. 그들은 인생길이 어차피 나그네 길인 것을 압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기에, 어디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소유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변전을 거듭하는 세상에 살면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벧전1:4)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세상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이 사람의 마음”(렘17:9)이라 했겠습니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이 세상의 물결에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13)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할 때의 그 ‘마음’(dianoia)은 우리 자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해력이나 감정, 의지를 두루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먹다’라는 말은 ‘어떤 뜻을 품는다’는 뜻이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온 힘을 다해 붙들라는 말이 됩니다. 적당히 살다가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다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눅1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인내입니다. 우리는 조급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뭐든 쉽게 결론을 내고 싶어합니다. 오늘 기도한 것이 내일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진정한 재능이란 ‘지속의 열정’입니다. 일단 분명한 목표가 세워지면 주변에서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가는 사람이 어떤 일을 성취해냅니다. 조금 걷다가 ‘여기가 아닌가봐’ 하고 돌아서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지름길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직하고 미련하게 믿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牛步千里라지 않습니까?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이 위임해주신 일들을 천천히 하다 보면 어느 결에 주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 우짜노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을 품은 이들이 지향해야 할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14-15)

그리스도와 만나기 이전의 삶을 베드로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욕망이란 매우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남 배고픈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제 배를 먼저 불리고 보는 것이 욕망입니다. 욕망은 늘 어떤 대상을 향하지만, 그 대상을 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모를 때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여러분을 불러주신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욕망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의 기자들은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시103:8)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마음 하나 잃어버리면 삶은 지옥이 됩니다.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는 ‘어, 비 오네’로 시작하여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하는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남들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듣는 ‘우짜노’라는 탄식이 참 신선합니다. 그래서 반칠환 시인은 이 시를 읽고는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창문 밖 장마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시인은 시 한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좋지요?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거룩한 삶이란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꾸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비움의 길
베드로 사도는 자칫 우리가 그런 생의 목표를 잃어버릴까 싶어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환기시켜줍니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18-19)

우리의 욕망은 무지함에서 비롯됩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욕망의 포로가 됩니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고, 쾌락과 재미에 빠집니다. 그런 욕망을 따르는 삶의 결과는 ‘헛됨’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주님을 그 자리에 모실 때라야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좀 덜 먹으면 어떻습니까? 좀 불편하게 살면 어떻습니까?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은 그저 부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욕망의 길은 채움의 길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은 비움의 길입니다. 욕망을 덜어낸 자리에 하늘의 맑음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저는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아무리 닦아보아도 닦이지 않는 더러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니, 닦음 자체를 거부하게 하는 음험한 힘이 우리 속에서 작용합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을 죄 아래에 팔린 몸이라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런 헛된 삶의 방식에서 해방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죄값을 당신의 생명을 바침으로 치루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피가 지금 우리 속에 있습니까? 저는 본문을 묵상하다가 1930년대의 사랑의 신비주의자 이용도 목사님의 시를 떠올렸습니다.

• 피를 주소서
피를 주소서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 없고, 힘 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 가되, 그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유린하되, 그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기이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속에 있어야 우리는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죄된 세상과 싸울 수 있습니다. 생을 경축하며 살 수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지갑을 열어 배고픈 이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막힌 담을 헐어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게 만들고, 평화와 생명이 넘실대는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자본주의 질서가 우리에게 부과한 신기루를 따라가다가 기력을 잃고, 결국에는 ‘헛됨’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이 하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모르고 사는 것, 그래서 무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타락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핏기 없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모르고, 싸워야 할 때 싸울 줄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그 피가 있어야 우리는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주님께 바칠 알찬 열매가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어야 할 때입니다. 메마른 가슴에, 가정에, 일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꿈을 꾸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9월 17일 14시 12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