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9. 소명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6:1-8
설교일시 2006/09/24
오디오파일 s060924.mp3 [637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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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이사야6:1-8
(2006/9/24)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조선 시대의 영조 임금은 1724년에 즉위하여 1776년까지 왕위에 있었다지요? 대단한 세월입니다. 유다의 왕 가운데도 52년간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주전 8세기 중엽의 웃시야(783-724B.C.E)입니다. 그는 꽤 유능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유다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군사적인 성공도 거두었습니다. 그는 블레셋과 아라비아를 정복하고, 오랜 적대국인 암몬을 정복해 조공을 받았고, 국토를 요새화했습니다. 군대를 재편성하고, 사회적 재화가 일부의 사람들에게 편중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행정가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만심에 빠져 제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 했습니다. 왕이 막 제단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대제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80명의 제사장들이 왕의 앞을 가로막고 저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사장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제단에 손을 댔습니다. 그때 그의 이마에 갑자기 한센병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왕위를 아들인 요담에게 물려주고 별궁에 머물렀습니다. 강력한 통치자가 사라지자 국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번영을 지키고 발전시키기에 요담은 너무 유약했던 것입니다. 몇 해 후 웃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체험한 것은 웃시야 왕이 죽던 바로 그해였습니다. 백성들이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 그는 말씀의 전달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성전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이사야의 심사는 아마도 착잡했을 겁니다. 장차 나라가 어찌 될는지도 걱정이고, 신앙적 긴장감 없이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의 현실도 걱정이었을 겁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철든 자식이 되는 것처럼 이사야는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 아프심을 헤아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한 분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일과 인간의 행실로 말미암아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뎌진 영혼의 둔감함입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1:15)

자식에게 외면당하는 부모의 아픔처럼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 아픔이 이사야의 가슴에도 그대로 아픔이 되어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 거룩의 현존 앞에서
어느 순간 그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주님 주변에서 날아오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찬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 장엄하고 초월적인 광경 앞에서 이사야는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공포의 감정과는 다른 외경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5)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면 누구라도 자기의 부족함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랑스레 떠벌리던 지식, 경험, 지위, ‘이 정도면…’ 하는 헛된 자기만족, 이 모든 것들이 다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어두운 밤에는 보이지 않던 옷의 얼룩이 대낮이 되면 환히 드러나듯이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의 허물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사야가 경외감에 압도되어 있을 때, 스랍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들고 그에게로 다가와 그것을 입에 대며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거듭남의 순간이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절감 이외에 그가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51:17)

•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
그 받아들여짐의 시간에, 그 치유의 시간에 이사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8a) 이 말씀은 참 놀랍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 할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우리 삶 속에서 끝없이 이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사람일 겁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파송하신 자리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명령 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입니다. 때로 우리는 삶에 권태를 느끼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성은 흐릿해지고, 의지는 허약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회복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우리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지금 이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바다 깊은 곳에 살면서 눈이 퇴화되어버린 심해어처럼, 돈과 힘을 추구하느라 하늘을 잃어버린 이 세상을 보며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얼마 전에 저는 아주 유쾌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러시아의 수학자인 그리고리 페렐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클레이 연구소가 100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지정한 ‘수학의 7대 난제’ 중 한 문제인 푸앵카레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것은 우주 공간의 생김새에 관한 가설이었다고 하는데 수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게 얼마나 큰 업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수학 외적인 요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푸앵카레 문제에 대한 해답도 권위 있는 학술지에 게재한 것이 아니라, 아무나 볼 수 있는 인터넷에 올렸다고 합니다. 그가 세계 수학자 대회의 수상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잠적했습니다. 세계 수학자 연맹의 존 볼 경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그를 찾아갔을 때 페렐만은 “문제를 풀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돈과 명예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로 만든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고향에서 노모와 월 50,000원 정도의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삶도 유쾌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 나를 보내소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b) 하고 응답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실지 아직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모험입니다. 저는 요즘 새삼스럽게 간디의 말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지금은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청파교회에 부르신 까닭은 평화의 일꾼, 생명의 일꾼이 되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구비된 뒤에 등장하는 손님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경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해야 하는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일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전도자가 말하듯이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합니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합니다(전11:4).

주님의 현존 앞에 있는 우리는 이제 세상에 나가 돈과 힘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와 배려와 환대의 마음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절망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고, 전쟁과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이들 곁에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초대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행해야 할 사명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삶은 지리멸렬해집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제 아무리 크다 해도 지레 겁먹을 것 없습니다. 우리가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완수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 삶의 최종적인 기준이 아님을 삶으로 보여주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9월 24일 12시 51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