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0. 책을 펼 때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느8:5-12
설교일시 2006/12/10
오디오파일 s061210.mp3 [6032 KBytes]
목록

책을 펼 때에
느8:5-12
(2006/12/10)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는, 백성들이 제 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돌아들 가십시오.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오.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달래면서,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슬퍼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모든 백성은 배운 바를 밝히 깨달았으므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 느헤미야라는 사람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능력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자기 밖으로 나가는 능력을 일러 ‘자기 초월’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초월을 경험할 때 성숙해집니다. 성숙한 사람의 특색은 자기 좋을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늘 남을 배려하고, 때로는 자기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쓴 글씨 가운데 “見利思義 見危思授命”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익을 보면 그것이 옳은가를 생각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람됨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글귀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이익에 집착할 때마다 우리 정신은 점점 잗다랗게 변합니다.

느헤미야서를 열 때마다 나는 느헤미야라는 존재의 무게감 때문에 가슴 뻐근한 감동을 맛보곤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사랑을 받는 관료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예루살렘에 다녀온 그의 형제 하나니가 안부 인사차 찾아오면서 그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니를 통해 동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황폐해진 예루살렘의 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아픔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앉아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렸습니다. 그 마음 아픔이야말로 역사의 초대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름이었던 셈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나아가 자기의 마음 아픔을 이야기하고, 무너진 도성을 재건하는 일에 자기를 보내달라고 요구합니다. 왕의 허락을 받은 그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공감의 사람(man of sympathy)이었기에 민족의 고통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었고, 기도의 사람(man of prayer)이었기에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받았고, 인내의 사람(man of endurance)이었기에 온갖 방해와 시련을 끝끝내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야말로 자기 초월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초월의 능력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께 귀의함’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상실할 때 우리는 자기 이익이라는 영혼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경청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협력하여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무리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무너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성벽을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떤 일을 기획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먼저 그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기도와 눈물과 땀과 희생과 용기로 이루어낸 백성들은 이제 비로소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가슴 벅찬 깨달음이 그들을 한자리로 불러모았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은 수문 앞 광장으로 몰려와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읽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력으로 7월 1일이었는데, 종교의식을 중심으로 한 책력에 따르면 새해(Rosh Hashanah)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나무 단 위에 서서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율법 두루마리를 펼치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낭독되는 율법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3).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아람어 밖에는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말씀을 아람어로 통역해주었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모두 울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망각한 채 욕심에 이끌려 살아왔던 삶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열정적으로 모이고,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으로 응답하고,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슬퍼할 때 무너졌던 내면의 등골이 곧추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안일한 생활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열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Bernard Brandon Scott)은 예수님의 비유를 한마디로 ‘세상 다시 그리기’(re-imagine the world)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세상을 다시 그린다는 말은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셨던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그린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약자들과 상처입은 이들에게는 치유하는 바람처럼 다가갔지만, 기존 질서에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에게는 광풍이 되어 그들의 삶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그것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불편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백성들이 지켜가야 할 마땅한 삶을 길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그 말씀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몫을 빼앗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소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으려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을 때 그 말씀은 불편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몸둘 바를 몰라 그저 하염없이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은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백성들을 타일렀습니다. 이것은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슬픔을 넘어 더 근원적인 기쁨을 보라는 초대입니다. 그 기쁨은 슬픔을 거쳐서 갈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보는 자는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속에 드리운 어둠을 보는 자도 슬퍼하게 마련입니다. 슬픔을 외면할 때 우리 영혼은 천박해지고, 허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마5:4).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본 백성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지도자들이 막으려는 것은 슬픔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슬픔에 매몰되어 말씀과의 만남이 가져오는 근원적인 기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슬픔이 없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거쳐서 얻는 기쁨입니다. 마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헛된 것에 집착하고, 사소한 이익에 목숨 거는 이 가련한 우리,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처럼 세상을 방황하는 우리를 끝끝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 용납하고 용서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의 기쁨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10) 저는 이 말씀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살다보면 삶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매사가 시들해지고, 그래서 정신적인 우울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침체로부터 벗어날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앉아야 합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앉아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힘은 외적인 힘 ‘force’가 아니라 내적인 힘 ‘power’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사람만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비폭력적인 싸움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난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다바르dabhar'는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즉 말씀이 곧 수행인 말씀입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않는 우리의 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온 힘을 다해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 속에서 끝없는 온기와 사랑을 공급해줌으로써 우리가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해줍니다.

• 한 사람의 꿈이
신학자인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다바르를 담는 독특한 성례용 그릇”이라 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 곧 다바르가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불의와 거짓와 위선으로 얼룩진 세상과 맞서 싸우는 하늘의 전사가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불굴의 용기와 공감하는 사랑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진 백성들의 마음의 주춧돌이 되어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불신과 미움으로 말미암아 터가 흔들리는 이 나라를 든든하게 세울 이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있는 이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의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 길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당신의 몸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마굿간 같은 우리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깨끗이 비우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펼 때 이스라엘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거룩한 그릇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불굴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주님의 꿈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12월 10일 12시 19분 5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