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1. 생각지 않은 날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24:45-51
설교일시 2006/12/17
오디오파일 s061217.mp3 [5644 KBytes]
목록

생각지 않은 날에
마24:45-51
(2006/12/17)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통솔하게 하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맡겼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쁜 종이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늦게 오시는구나’ 하면서,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 종을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 허무를 넘어서는 소망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이 물음 앞에 서면 우리는 객관적인 해답을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나는 어떤가? 내게 맡겨진 일을 기뻐하며 감당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시간 속에서 멀미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 좀 더 충실하게 살지 못한데 대한 자책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12월이 되면 더욱 그런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저는 삶이란 점묘법(點描法, pointillism)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점묘법이란 화면에 다양한 색의 점을 찍음으로써 어떤 형상을 드러내는 기법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점은 늘 전체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점묘법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들이 들인 공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낍니다. 인생도 그런 것이겠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에 방점을 찍듯 살아야 충실한 삶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삶의 궁극적인 지향과 일치되는 방향이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시간을 하나의 연속체로 경험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으니 내일도 당연히 다가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룻밤 무서리가 내리면 화단의 꽃들은 속절없이 시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기운인 숨이 우리 속에 머물 때 우리는 살지만, 그 숨을 거두어가시면 우리는 정든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코헬렛(전도서의 기자)은 세상의 모든 것 위에 붙여진 ‘헛됨’이라는 찌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애착하는 것들도 한 순간에 안개처럼 흩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허무하니까 대충대충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인생이 허무한 듯 싶지만, 허무를 넘어서는 소망이 있기에 인생은 존엄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롬8:20-21)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이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에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시간 속에서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삶은 힘겹고, 고독과 고통도 여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걷는 사람은 비틀거리지 않습니다. 임사 체험자들, 즉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인생의 최고의 스승인 죽음과의 대면을 통해서 그들은 죽음이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땅의 길이 하늘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들은 지금까지 집착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지푸라기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 흥해라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예수님은 여기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염두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큰 자’로 여기는 지도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종’이라 하십니다. 청지기oikonomos가 아니라 종dulos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자칫하면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기 일쑤입니다. 겸손하고 소박해 보이던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서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쾌락보다 달콤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겠지요. 단소를 연주할 때 제일 높은 소리인 ‘태㳲’ 음을 낼 때는 마음을 가장 낮은 곳에 두어야 소리가 제대로 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원해서든 마지 못해서든 드러나는 자리에 서게 될수록 마음을 자꾸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욕됨의 자리가 되고 맙니다. 시인 정현종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權座는 저주의 수렴이요
權座는 치욕의 원천이며
權座는 강력한 汚點이다

주인이 집을 지운 사이, 주인의 일을 대행해야 할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그 자리를 사욕을 채우는 자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거들먹거려서도 안 됩니다. 그는 늘 주인의 눈으로 집안일을 살피고, 주인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소홀한 일은 없는지, 아픈 사람은 없는지, 배고픈 사람은 없는지, 억울한 사람은 없는지….

지난 월요일에 몇몇 분들과 함께 강원도 간성에 다녀왔습니다. 복음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희망을 싹을 틔우려고 애를 쓰고 계신 목사님 내외분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년 결산이 채 800만원도 안 되는 교회였지만, 그 교회는 지역 사회의 아픔을 끌어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모님은 깨진 가정에서 자라나 거의 방치되고 있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지역아동센터를 열었습니다. 방과 후 교실을 열어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고, 피아노를 무료로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가슴에 따뜻함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지역아동센터의 이름은 ‘흥해라’였습니다. 저는 그걸 ‘일어날 興, 흥겨울 興’의 ‘흥해라’라고 생각하면서 아동센터 이름으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고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것은 앞치맛자락을 들어 아이의 코를 닦아주며 ‘흥 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정깊은 돌봄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가슴이 찡 해왔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인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마더 테레사랍니다. 힌두교인도 무슬림도 시크교도도 자이나교도도 아닌 사람, 인도인도 아니고 루마니아 출신의 수녀, 배우들처럼 멋진 외모도 아니고 오척 단구의 보잘것 없는 여인에게 인도인들이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피부색을 넘어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그의 넓은 가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 앞에 있는 가련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었을 뿐입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란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종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주인은 그에게 더 귀한 역할을 맡길 것입니다.

• 주인의 부재를 즐기다가
신실한 종이 있는가 하면 악한 종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악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다 선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이루는 집단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무한 경쟁 시대라느니,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 삶을 초토화시킨지 오래입니다. 지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하고, 달리다 보니 전망이 협소해지고, 이웃들과 소통할 여백을 마련할 수도 없습니다. 의식주의 형편은 나아진 것 같은데, 정신적인 위축감은 더욱 커져갑니다. 지난 시절을 풍미했던 어떤 분의 어조로 말해볼까요? “이게 뭡니까?”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길을 잘못 들은 것이지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게 문제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악한 종’이라 지칭된 사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악한 종은 봉사를 위해 맡겨진 직무를 당장 권력관계로 바꾸어버립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지요. 호가호위狐假虎威인 셈입니다. 호랑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한다지요? 그는 주인의 부재를 틈 타 권력자 행세를 합니다. 돌보라고 맡겨진 사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호기를 부립니다.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순간을 연장하고 싶어서 스스로 신화를 만듭니다. ‘주인은 금방 오시지 않을 거야.’ 이것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원망 사고'(wishful thinking)에 불과합니다. 주인은 ‘생각하지도 않는 날에, 뜻밖의 시간에’ 돌아옵니다.

악한 종의 또 다른 문제는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주인은 할 수만 있다면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거두어 살게 해주고, 신뢰해주는 주인의 마음을 그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말이 떠오릅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악한 종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가혹합니다. 우리 말 성경은 주인의 징계를 뜻하는 ‘dixotomesei'를 ‘처벌하다’ 혹은 ‘엄히 때리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 본래의 뜻은 ‘두 동강내다’(dismember)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요절난다’라든가,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린다’는 말처럼 당사자의 분노를 좀 격하게 표현한 단어입니다. 악한 종은 결국 위선자들이 받을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대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잘려 나가게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새벽의 사람
우리는 지금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각하지도 않는 날’에, ‘뜻밖의 시간’에 우리에게 오십니다. 화창한 날일 수도 있고, 흐린 날일 수도 있습니다. 고독한 날일 수도 있고 즐거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형편을 핑계삼아 적당히 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주님 앞에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교회들은 물론이고, 이주 노동자들, 실직자들, 노숙자들, 도시 빈민들…. 주님은 우리가 그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일부는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들과 협력하여 쪽방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겨울나기 지원을 위해 사용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을 공급하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새벽의 사람입니다. 참 길을 걷는 사람은 이미 참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돌봄과 나눔의 사역을 위해 땀 흘리는 시간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충만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허무한 데 굴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릴 자유와 영광을 내다보며 살아갑니다. 이 소망이 우리 삶에 밝혀진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12월 17일 12시 12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