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2. 아기로 오신 하나님
설교자 김준우
본문 눅2:8-14
설교일시 200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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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로 오신 하나님
눅 2:8-14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한편으로는 세상이 참 많이 변했고, 많이 편해졌으며,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좋은 세상은 언제나 올 것인지, 제가 죽기 전에 그런 좋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탄절을 맞아, 특히나 금년에는 불경기로 인해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도 울려 퍼지지 않는다는 요즘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욱 어둡게 느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대로, 있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대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인 듯합니다. 집 값 안정 문제도 “부동산 광풍”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미친 듯 폭등해서 빈부격차를 더욱 악화시켰고, 많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간해서는 잘 참고 견디는 농민들까지도 한미 FTA 협상 반대 데모를 하고,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많은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협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한편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농민들은 자신들이 힘겹게 바다를 메워 만든 땅에서 또 다시 쫓겨나게 되어 한숨과 분노로 이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여름 물난리를 겪은 북한의 주민들은 금년 겨울에도 식량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정치권이 벌써부터 시끄럽지만, 서민들의 고통과 직결되는 부동산 문제이든, 사회 양극화 문제이든, 한미 FTA 협상 문제이든, 취업난과 비정규직 문제이든, 사립학교를 투명하게 만드는 일이든, 북핵 문제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이든, 환경 파괴 문제이든 간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단순히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 하기에, 희망을 찾기가 더욱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희망을 찾기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 세상에 더욱 밝은 빛을 비추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들은 사람들은 한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에 들판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가장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목자들이란 창녀들과 마찬가지로 천민계층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서 소작농보다도 못한 천민계층에 속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대체로 남의 양떼를 대신 맡아서 키우던 고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은 안식일이라고 양떼를 놔두고 회당에 갈 수도 없었으니, 안식일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라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따돌림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인생에 별다른 희망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세상이 서럽고 한이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두 번째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기 전에는, 세상에서 도무지 신통한 꼴을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서, 구주가 나셨다는 그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주셨다는 말입니다. 안락한 잠자리는 그림의 떡인 노숙자와 같은 사람들,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특히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들이라고 멸시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멸시와 천대를 삼키는 사람들, 그 깊은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하루하루 절망을 견디는 사람들, 눈물마저 메마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가장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멸시 당하고,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은혜와 위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락함 속에서, 또는 어둠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굳어져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절망적인 현실 속에 헤맬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고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인가요?
대학생들 가운데는 종종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동정녀 탄생 교리가 여러분들에게 믿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요즘 많은 신학자들은 거의 2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 말씀이나 교리들이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진실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고백으로서 신화라는 은유로 표현된 진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그 사실 여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미리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인가요?
첫째로,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 속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식놈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으면, 부모는 마음을 졸이게 되지요. 아침까지도 연락이 없으면, 이 녀석 혼줄을 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면, 아이가 갈만한 곳을 수소문을 하게 되지요. 이 녀석이 밥은 제대로 먹는지, 잠은 제대로 자는지 걱정이 되지요. 그러다가 며칠만에 연락이 와서 갑자기 아파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거나 무슨 사정이 생겨 집에 들어가지 못했었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멀리 있다 하더라도 단숨에 달려가는 게 부모의 심정이지지요. 때로 아이가 가출한 이유가 결국에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설정해 놓고, 그 수준까지 올라오도록 요구했던 것이 자식놈을 힘들게 만들고 견디지 못해 가출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아이의 눈높이까지 부모가 낮아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마음을 열고 낮아지는 것임을 배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으로 내려오신 이유도 바로 이처럼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 거룩하신 하나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가 타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음을 열고 우리를 찾아 내려오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창조주 하나님처럼 존귀하고 존엄하며, 거룩하고 당당하며 올바를 뿐 아니라 사랑이 넘치며 창조적인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쿠리지처럼 돈의 노예가 되어 너무 외롭고 쓸쓸하게 비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우리를 찾으려고, 우리처럼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 속에 내려오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식놈이 물에 빠지면 건져내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물 속에 뛰어드는 것이 부모이듯이, 집에 불이 나면 자식놈들 살리기 위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것이 부모의 본성이듯이, 하늘 아버지께서도 당신이 생명을 불어넣으신 자녀들이 이 세상의 지배체제 속에 휘둘려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 어두운 역사 속에 뛰어드시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본성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늘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과 뜨거운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이 정결한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노예들과 소작농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특별히 성전세를 내지 못하는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 노동자들과 병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시 제사장들이 가르쳤던 하나님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은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조건을 붙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정결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한이 많고 슬픔이 많은 죄인들과 병자들도 모두 당신의 가슴 안에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생동안 이처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하게 온몸으로 살아내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온 천하보다 귀한 사람으로 가치 있게 만드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셋째로, 본문 12절에는 그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고 했습니다. 2장 7절에도 똑같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강보란 포대기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 기자가 똑같은 말을 두 번씩 되풀이 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왕이며, 우주의 왕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편 “구유”라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이미지였기에 누가복음 기자가 아기 예수님을 “구유” 안에 누워 있다고 두 번씩 강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임자인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며, 자신들이 매일 음식이 하나님이 풍성하게 마련해주시는 여물통이라는 사실, 즉 구유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다는 말은 이처럼 갓 태어난 이스라엘의 왕은 그 구유의 임자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구주”로 믿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쁜 소식”이라고 믿지만,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로마제국을 창시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었으며, 구주로 믿었으며, 그가 태어난 날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후 14년에 죽기까지 77년 동안 살면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통치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수많은 정복전쟁과 반란진압을 통해, 로마에 평화를 가져다 준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숭배되었고,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반란을 진압한 소식은 로마인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바루스 장군 휘하의 3개 군단병력을 파견하여, 나사렛 부근의 셉포리스라는 마을을 공격하여 그 주민들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렸고, 엠마오 마을을 완전히 불질러버리고 그 주민 2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유태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고백할 때, 그들은 정치적으로 반란죄에 해당하는 고백을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가져다주는 로마의 평화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국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정복전쟁과 노예제도를 통해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국들을 멸망시키고야 만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이집트 제국도, 앗시리아 제국도, 바빌로니아 제국도, 페르시아 제국도, 그리스 제국도, 로마제국도, 심지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아메리카 제국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가장 정면에서 방해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망시키고 만다는 사실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군사력이나 핵무기가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이 세상에 찾아오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돈이 아니며, 출세나 권력이 아니며, 제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당신의 사랑 때문에 참지 못하고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느끼고 그 한없는 사랑에 힘입어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맑게 빛나는 눈동자처럼, 우리들도 욕심을 비우고, 여관에 방이 없다고 핑계대지 말고, 오직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에너지와 사랑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데 아무런 차별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용서를 베풀어야 할 사람에게는 먼저 다가가 용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같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성도들간에 감정적인 응어리를 품고 있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자세가 아닌 줄 믿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마음을 닮아, 서로간에 섬기고 서로 돌보고 서로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더러운 사람이라고 멸시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들 모두가 존귀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기 때문에 온 천하보다도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이 교회 안에서 서로 확인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자본의 횡포가 더욱 더욱 잔인해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정치경제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법도 국익을 내세워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유린하고, 교육도 사회적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심지어 종교인들마저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상일수록,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처절한 절망과 어둠 속에서, 지극한 사랑과 섬김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 가신 분임을 더욱 굳게 믿고 우리도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 속의 악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체념하라고, 어차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는 짧은 인생인데, 남들처럼 적당히 살아가라고 꼬드기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유혹할수록, 희망이 없는 세상에 대해 눈을 감고, 귀도 닫고, 오직 영적인 평안과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의 본분이라고 유혹할수록, 언제나 만물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우리의 사랑의 수고가 더욱 굳건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맞이하고 축하하는 이 아침에, 저희들 속에 아기 예수님이 새롭게 태어나심으로써 저희들 속의 어둠과 절망을 극복하게 도와주시고, 이 세상의 잔인함과 폭력을 이기는 빛을 경험하게 은총 내려주시옵소서. 절망을 넘어서 희망을 갖게 도와주시고, 의심과 불신을 극복하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의 몸 속에 새롭게 드러나게 하시어 우리가 그 사랑과 빛과 희망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우리의 인생도 이 아침에 새롭게 태어나고,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의 화신으로 변화되게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등 록 날 짜 2006년 12월 24일 12시 39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