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2. 하나님의 사랑 고백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3:16-21
설교일시 2006/12/25
오디오파일 s061225.mp3 [323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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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고백
요3:16-21
(2005/12/25)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니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성탄절의 은유적 의미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게 뭔지 아십니까? 미인이지요?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은 뭔가요? 그렇지요, “사랑해”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 행복한 날입니다. 사랑 고백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6)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세상’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은 참 못나게 굴기도 하는 우리들조차 말입니다. 세상에서 외돌토리가 된 것 같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자장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시인 김용택의 아내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 당신이 내게 불러준 사랑노래는/이 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당신이 나를 너무도 소중히 여겨/나는 이 세상에 귀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한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내리사랑입니다. 성탄절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고백입니다.

성탄절이 한 해의 끝자락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세월을 허송한 듯한 깊은 회한과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는 시기에 다가옵니다. 빛과 어둠이, 낡은 것과 새것이 자리를 바꾸는 일종의 전환점인 것입니다. 경희대학교의 도정일 교수는 성탄절의 은유적 의미는 ‘극과 극의 만남과 화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고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자리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고, 성스러운 것과 비속한 것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우리는 스스로의 심판관
예수님은 재판정에 앉아 심판관 노릇을 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섬김과 나눔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삶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나 좋을 대로’가 없다는 말입니다. ‘남 좋을 대로’가 주님의 유일한 관심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력이 없는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의 존재는 어떤 이들에게는 소망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함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 지금 배고프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에게서 빛을 봅니다. 그러나 지금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 다른 이들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면서 제 배만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몫까지 빼앗으려 하는 이들은 그를 멀리 합니다. 주님은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심판관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밝혀줍니다.

• 경계 가로지르기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는 모든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차별하는 문화적․종교적․민족적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가 소통하는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차별과 맞서 싸울 때 우리는 세상에 드러난 주님의 현존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가 ‘부족적 종교’(tribal religion)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가장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이 말은 일쑤 우리 밖에 있는 ‘그들’을 상정하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담을 허무는 사람이 아니라 세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한 아동 병원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 소녀가 각각 심장과 폐, 간을 이식받았습니다. 열두 살 소녀 사마흐 가드반은 죽어가면서 5년이나 심장 이식 수술을 기다려왔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장기 기증을 꺼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장기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바라만 보던 소녀들의 부모들은 장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구세주를 만난 듯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수술 뒤 의사는 “따님이 이식받은 장기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팔레스타인 소년이 내 딸을 살리다니. 유대인 소녀들의 부모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소년은 열두 살 난 아흐마드였습니다.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아흐마드는 라마단 단식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이슬람 축제에서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흐마드의 총을 보고 사격을 해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아흐마드는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비탄에 빠진 아흐마드의 부모는 두 시간 뒤 아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건 팔레스타인 사람이건, 대상은 관계없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조연현,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 194-5쪽)

• 성탄절이 인류의 축제가 되려면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까닭은 차이와 차별이 만들어낸 갈등의 세상을 치유할 힘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면 우리는 불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종교, 나라, 피부색, 성별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던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사랑과 연민을 통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가만히 있어도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새 세상을 바라보며 꾸준히 나아가는 이들을 통해 실현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농토를 잃어버린 대추리 농민들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쪽방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시린 마음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300일이 넘게 농성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마실 물을 찾아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전쟁과 테러로 웃음을 잃은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인류의 절반을 인해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탄절을 진정한 인류의 축제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내리사랑에 대한 우리의 치사랑이 될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도록 힘써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12월 25일 12시 44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