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3. 때문에, 덕분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13:6-9
설교일시 2006/12/31
오디오파일 s061231.mp3 [5904 KBytes]
목록

덕분에, 때문에
눅13:6-9
(2006/12/31)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 열매 없는 삶의 쓸쓸함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밭에다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뿌려서는 안 된다”(레19:19)는 율법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지 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하니까, 주인이 3년 째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나무의 수령은 대개 6년은 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더러는 늦된 것들도 있게 마련이지만, 6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없다면 나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하는 주인의 역정은 이해할만합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에게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포도덩굴에 포도송이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도 없다”(8:13)고 탄식했습니다. 호세아는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9:10)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겠지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실수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신다”(요15:2) 했습니다. 너무 가혹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게 순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라버려야 할 것을 잘라버려야 나무가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곁가지들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우리 영혼이 무뎌집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덜어내도 될 것은 덜어내야 삶이 단순해지고, 단순해져야 힘이 생깁니다.

• 삶의 대차대조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는 살아온 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열매를 맺었습니까?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있습니까? 지금은 삶의 대차대조표를 기록할 때입니다. 재산의 증감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되셨습니까? 사람마다 기입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질병과 실패를 지출항목에 기록하는 이도 있지만, 수입항목에 기록하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실패와 고통의 쓰라림에 압도되어서 그 캄캄했던 시간의 이면에 있던 복의 계기를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사람에게 영원한 손해란 없습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는 정진규 시인의 노래처럼, 어둠이 없다면 별들의 영롱함에 우리 가슴이 그렇게 설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한 자로서의 자책감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물기 마른 우물처럼 푸석거립니다. 이웃들에게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지 못했고, 무거운 짐에 짓눌린 이들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에도 게을렀습니다. 초는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지만 사람은 이웃들을 향한 애태움으로 세상을 밝힌다는 데, 우리는 자기 생각에 골똘하다가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았습니다. 비난과 손가락질과 조롱의 말이 난장을 벌이고 있는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 무관심했습니다. 박명수라는 코메디언의 ‘호통 개그’가 인기를 끄는 것은, 합리적인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세상에서 불합리할망정 목소리 큰 사람이 득세하는 세상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의 마음이 묵정밭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중학생들이 동료 학생을 집단구타하면서 그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세상입니다.

피조물의 신음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를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요 며칠 반짝 추위가 있기는 했지만 기상관측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징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편리함을 구하며 삽니다. 삶의 방식을 바꿀 용기가 없습니다. 겨우 빈 밥그릇 운동에 동참하는 정도입니다. 창조 질서를 보전(保全)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신앙적 과제라는 자각이 부족합니다. 성도들은 덜 쓰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사는 일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종교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나라의 흥망성쇠 뒤에는 무능한 지도자와 더불어, 하늘의 소리에 둔감한 종교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들어야 할 소리를 선포하기보다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타락의 징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사람이라 해도 그가 큰 교회를 맡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덮어진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타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목사는 먹사로, 기독교는 개독교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몇몇 악의적인 사람들의 흠집내기라고 하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너무 깊어졌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는 소중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버림받은 이들을 보듬어안고 살아가는 이들,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강고한 자본주의의 질서에 틈을 만드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까맣게 불타버린 숲에서 돋아나는 여린 싹과 같은 이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이들과 연대하여 희망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열매를 구하는 주인에게 드릴 것이 없습니다.

• 포도원지기의 간청
하지만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간청하고 계신 포도원지기가 있으니 말입니다. 땅만 차지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8-9)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옛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여전히 교만하고, 무정하고, 돈을 사랑하며, 절제가 없고, 거칠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합니다”(딤후3:5). 이쯤 되면 ‘찍어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노염을 무릅쓰고 한 해만 더 기다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런 포도원지기를 두고 오지랖이 넓다 하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오지랖이 좀 넓은 게 좋습니다. 그는 지금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나무를 위해 주인의 노염받이가 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 그는 포도원을 돌보는 힘겨운 일에 무화과나무를 잘 가꾸는 일까지 떠맡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인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말하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성령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34)

• 사랑과 신뢰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기에 유예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각자에게 품부(稟賦)된 삶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믿음은 타자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뢰가 없는 믿음은 불가능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믿음은 공허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이들은 누구입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했던 세례자 요한, 이스라엘 중에 이런 신앙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을 받은 로마의 백부장, 죽음을 앞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조각을 주워 먹는 강아지에 비유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가나안 여인 등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남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어떤 수고와 멸시조차 감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기적의 통로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이 시간, 우리는 심판을 유예받은 이의 기쁨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누구 누구 때문’이라거나 ‘무엇무엇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사는 삶이니 이제부터는 값없이 베풀어진 사랑에 대한 빚갚음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함께 ‘좋으신 하나님’을 부릅시다.

등 록 날 짜 2007년 01월 06일 23시 31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