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 아버지와 아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5:17-20
설교일시 200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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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요5:17-20
(2007/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 뿌리 의식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새해가 열린지 벌써 이레째가 되었습니다. 뭔가 좀 새로워졌나요? 새해가 되어 수첩도 바꾸고 달력도 바꿔 걸지만 삶은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인가요? 아침에 일어나기 괴롭고, 하는 일이 즐겁지 않은가요? 지난 해에 하던 나쁜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셨습니까? 왜 삶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무정한 시간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유정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는 새로운 삶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새해의 새로움은 새로운 사람 되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까닭은 삶의 초월적인 전망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땅의 현실에만 붙들려 하늘을 보지 않는 데 우리 삶의 병통이 있습니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민담을 아시지요?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살면서도 선녀는 자기의 고향 하늘을 잊지 않았기에 결국 하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反者, 道之動이라 했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입니다. 연어는 때가 되면 자기가 알에서 깨어난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철새들도 때가 되면 가야 할 곳으로 날아갑니다. 사람도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떠나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보내신 분이 맡겨주신 일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 의식입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압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살아있는 시간은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그 고통의 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남김없이 수행한 자의 홀가분함이 배어 있습니다. 삶의 끝에 서서 ‘헛살았다’라는 자책을 하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새겨보며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일터인 세상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은 38년 동안이나 병에 시달리던 사람을 안식일에 고쳤다고 하여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색이 뭘까요?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는 능력을 잃는 순간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하나님이 심어주신 본래의 품성은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자, 여기에 고질병으로 신음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살림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고,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어쩌면 석고상처럼 무표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성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축하해주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한 병자가 건강하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그의 몸속에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그걸 볼 눈이 없습니다. 율법 조문에 집착하느라고 구원의 현실에는 청맹과니가 되었던 까닭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후3:6)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닭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아직 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매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온갖 죄와 헛된 욕망, 억압과 가난과 차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는 그런 역할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오히려 종교적인 독단과 편협함 속에 가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 믿으면 저 푸르고 넉넉한 가을 하늘처럼 서늘한 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됨이 넉넉하고, 품이 넓어서 누구라도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셨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과거에 속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고투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창조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거대 자본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세력들은 쓰나미처럼 다가와 우리의 정신을 거덜내고 있습니다. 무력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오기 어렵습니다. 희망으로 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 보고 배우기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주님은 희망의 씨를 심으셨고, 미움과 증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아들도 그대로 한다.”(19)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뜻과 생각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불합리해 보입니다.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깨끗이 비우셨습니다. 깨끗이 닦인 유리창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왜곡됨이 없이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렸기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한다고 하여 그를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더할 나위없는 친밀성의 표현입니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가장 큰 공헌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이라 했습니다. 언제나 念天呼父 하는 것이 믿음이랍니다. 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부를 때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때로는 의를 세우기 위해 매를 들기도 하시지만, 더 큰 사랑으로 사람들을 품어안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는 낭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건물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보살핌’과 ‘아낌’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기본 질서입니다.

지금 세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산성’입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가차 없이 도태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틈을 내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있는 김종철 교수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환경파괴적이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여성주의 경제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성주의 경제학이란 여성들이 집안에서 해왔던 일들, 이를테면 가족과 노약자를 돌보고 텃밭을 가꾸고 가사 일을 처리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해가는 일같이 일견 사소해 보이는 일의 가치가 존중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합니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보살핌이 중심이 되는 경제는 하나님의 경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하고 친해져서 복이나 좀 받아보자는 것입니까? 넉넉하게 살고, 사업 잘 되고,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고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초보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한 결단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것은 그들을 보며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아들도 그대로 한다.” 바로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으로
비록 서툴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자꾸 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이명원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참회록을 쓰듯 쓴 글(한겨레신문, 2007년 1월 4일자, [연민이 아니라 존엄이다])인데, 저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는 식당에서 젓갈을 넣지 않고 숙성시킨 김치에 돼지 목살이 양껏 얹어진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흐뭇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식당 문이 열리더니 잿빛 점퍼를 입은 사내가 들어섰습니다. 머릿결은 오랜 노숙 생활 탓으로 기름때가 엉겨 있었고 눈빛은 흐렸고 목소리는 주눅들어 있었습니다. “혹시 남는 김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주인에게 거절을 당했는지 그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이 다소 불편했겠지요. 그런데 그는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 여자가 식당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다시 들어온 그 여자는 자기 식탁 위의 김치를 포장한 후, 계란말이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고, 그것을 들고 다시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에는 거절당한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이 날의 풍경은 간단합니다. 한 사내는 음식 예찬을 하며 등을 돌리고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내는 김치를 구걸하고 있고, 또 한 여자는 구걸하는 사내에게 제 몫일 음식을 내주고 있는 풍경입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경험한 이 일이 이명원이라는 한 사내의 가슴에 어떤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 그 식당에서 보았던 여인은 이명원에게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습니다. 그는 말없는 메신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불편하다는 느낌보다 먼저 누군가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천국에 속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해주실 겁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그려온 그림을 부모가 액자에 넣어 보관하는 것은 그 그림이 가장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자기 아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낙서처럼 보여도, 그 그림은 부모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일 겁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조차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쓰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하시는 일을 숨김없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바치고, 그들 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 존재는 환해질 것입니다. 올 한 해 어떤 마음으로 사시렵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의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2007년 01월 07일 12시 11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