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 믿음, 새 삶의 현관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골3:1-11
설교일시 200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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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새 삶의 현관
골3:1-11
(2007/1/14)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어려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 추구하라, 생각하라
기독교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관습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라고 권고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렇기에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자’(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전 인격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말로 synēgerthēte인데, 그것은 마치 시체가 벌떡 일어나듯 격변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총체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주변 세계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피하거나 신의 호의를 사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신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희생과 정성이지 사람들의 삶의 내적인, 도덕적인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야훼 종교의 새로움입니다. 우리가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두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위’라는 말은 방위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닙니다. 파주나 화천에 사는 이들도 서울에 갈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부산이나 대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는 말은 우리 주님이 추구하셨던 삶의 중심을 붙잡으라는 말일 겁니다. 중용의 핵심은 ‘允執厥中’이라는 말에 다 담겨 있습니다. 오로지 그 중심을 굳게 잡는 것이 진리 공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마음 하나를 붙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또 ‘추구한다’는 말은 마음의 지향 정도가 아니라 온 존재를 기울여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은 그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해저에 묻힌 보물을 찾아 일생을 거는 사람도 있고,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에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 이게 참 문제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암탉이 알을 품듯 가슴에 어떤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 절실하면 그 세계는 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성리학을 공부하다가 풀리지 않는 한 대목 때문에 한동안 번민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퇴계 선생같은 분이 나타나서 뜻을 밝혀주신 적이 있습니다.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존경하는 선생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힌트를 준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찬송가 219장 2절의 가사대로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람이 간절하면 그 바람은 현실이 됩니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에 품은 뜻을 살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 죽이라, 땅에 있는 지체를
앞서도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의 실존은 옛 삶에 대한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철저히 죽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생명의 신비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맛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좀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어순으로 보면 ‘죽이라’는 명령형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은 뒤에 나옵니다. 매우 강렬한 요구입니다. 죽여야 할 것은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탐욕입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상대를 ‘대상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마음씀을 탐심이라고 말했고, 그것의 결국이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이해합니다. 문제는 그런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도 소중한 중심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덕 좀 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목적 그 자체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돈벌이의 수단이나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4:31)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버려야 할 것은 그뿐이 아닙니다.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분노(orgē)는 확고한 의지적인 분노이고 격분(thymos)은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을 뜻합니다. 악의는 분노가 고질병이 되어서 누군가를 향해서 품는 나쁜 생각입니다. 부끄러운 말은 남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말은 상처를 싸매고 나누인 것을 이어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조롱하고 비방하고 냉소하는 말들을 삼갈 때 우리 내면은 고요해집니다. 대통령을 욕하고 조롱하는 게 사람들의 취미생활이 된 듯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욕할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니, 거꾸로 자기를 돌아보고 싶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욕합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부끄러운 말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말은 아무런 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만 삼갈 줄 알아도 우리 영혼이 맑아질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옛 사람의 관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애를 써보아도 잘 안 됩니다. 우리는 이내 옛 삶의 관습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바울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3-14)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은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숨어 있던 제자들은 성령체험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골방문을 열고 나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가 어둠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통회 자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 새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10)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인은 부단히 자기를 개혁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에게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자기 만족은 없습니다. 자기를 벗고 또 벗으면서 참 지식을 얻을 때까지 위를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여기서 참 지식이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새 사람은 누구인가?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금년부터 우리가 결단의 찬양으로 부르는 <하나님 눈길 머무신 곳> 가사가 이 뜻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눈길 머무신 곳 그곳에 내 눈 머물고
하나님 손길 닿으신 곳 그곳에 내 손 닿으리
하나님 마음 두신 그곳 그곳에 내 맘도 두고
하나님 계획하신 그곳 그곳에 내 삶 드리리
나 경배합니다 주님 주님만 닮게 하소서
나 예배합니다 주님 주님만 좇게 하소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내일(1월 15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그는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 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인간이란 인생이라는 바다에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찬동하지 않습니다. 저는 인류는 인종주의와 전쟁이라는 암흑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평화와 인류애의 새벽을 맞이할 수 없다는 생각에도 찬동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박격포가 터지고 총탄이 날아다니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거리에서 부상당한 채 뒹굴고 있는 정의는 언젠가는 더러운 치욕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언젠가는 전 세계 민족들이 신체를 위하여 세 끼 식사를 하고 정신을 위하여 교육과 문화를 향유하며 영혼을 위하여 인간적 존엄과 평등,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찢겨진 대의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류가 신의 제단 앞에 엎드려서 전쟁과 유혈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둘 것이며 비폭력적인 호의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승리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자유의 도시를 향하여 줄달음치다 지친 우리의 발에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믿음이란 철저한 낙관주의(radical optimism)입니다. ‘그저 잘 되겠지’ 하는 심정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섭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낙관주의 말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현관입니다. 지금은 비록 악이 성한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선이 승리할 것을 믿으며 오늘 선의 편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야말로 희망인 것입니다. 이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복된 곳으로 바꾸어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1월 14일 12시 29분 0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