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 신뢰와 위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18:19-23
설교일시 2007/01/21
오디오파일 s-07-0121.mp3 [691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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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위임
출18:19-23
(2007/1/21)

[이제 내가 충고하는 말을 듣게. 하나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자네는 백성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일을 아뢰게. 그리고 자네는 그들에게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게.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 그리고 그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워서,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은 모두 자네에게 가져 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 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자네가 이와 같이 하면, 자네도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도 모두 흐뭇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걸세.]

• 신앙공동체의 확장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미디안 광야에 당도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헤아리면서 그들을 환대해주었습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미디안은 장년의 모세가 40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제사장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살던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하여 다 듣고 있었습니다. 일단의 하층민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오아시스 지대를 거쳐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벌어진 열 가지 재앙 이야기, 홍해 바다에서 일어난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건….

히브리인들이 마침내 미디안 광야에 들어오자 이드로는 가솔들을 이끌고 모세를 찾아옵니다. 모세가 십보라와의 사이에서 낳았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도 데려왔습니다. 모세는 장인을 반갑게 영접하고는 자기들이 겪었던 고난의 현실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사건을 다 고하였습니다. 이드로는 매우 기뻐하면서 압제자에게 벌을 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똑똑히 알겠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비이스라엘 공동체에 야훼 신앙이 접목되는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광야에 사는 이들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자의 진실한 고백은 이처럼 아름다운 변화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드로는 즉시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와서,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제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다음 날 이드로는 사위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송사를 다루려고 자리에 앉아 있고, 백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의 모듬살이가 일어나는 곳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가 봅니다. 함께 고통을 겪어내고 함께 구원을 체험했던 감격은 어느새 사라지고, 열악한 삶의 조건이 가져오는 불편함만이 도드라졌기 때문일 겁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형편이 어려울 때 더욱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늑대라지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하튼 모세는 그들 사이의 갈등을 잘 조정하지 않으면 이 연약한 공동체가 깨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무너진 정의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로 유지되는 애굽의 전제정치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모든 사람이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인들은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그 땅의 백성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혼자서 몸이 달은 것은 모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영적으로 보면 아직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오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이 들면 금방 누군가를 원망하곤 합니다. 모세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백성들 사이를 중재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역량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과중한 일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위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로는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하다가는 스스로 탈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지치고 말 것이라며 아주 조심스럽게 모세에게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서 백성들의 문제를 아뢰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시콜콜한 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관심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삶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를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먹고 마시고 벗들을 만나고 일하는 등의 일 속에 하나님을 모실 때 그 일은 돌연 성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과 지식에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여쭐 용기를 가질 때 우리 삶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 여쭈어 볼 때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힘과 지혜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여쭐 때 우리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장 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풀어가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마르지 않는 샘을 가르쳐준 셈입니다.

• 역사의 주체로 서기
이드로가 모세에게 준 두 번째 충고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백성들을 자기 운명의 능동적인 주체로 세우라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노예의 특징은 투덜거림과 원망(resentment)입니다. 자유인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인생의 수업료로 여깁니다.

성 프랜시스 대학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성공회 산하에 있는 다시 서기 센터와 삼성코닝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8개월 과정의 인문학 배움터입니다. 그 대상은 노숙인들입니다. 인문학자들이 나서서 그들에게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글쓰기 등을 가르칩니다. 될까 싶지만 이 과정에 사람들이 넘치고 있답니다. 노숙인들은 밥에만 굶주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감의 결핍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문학을 배우면서 자기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마친 이들은 다시 공적인 세계로 귀환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살아있음의 의미가 필요합니다. 낙심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방편만이 아닙니다. 삶의 이유가 더욱 필요합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이 죽음을 택하지 않는 것은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사는지,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가슴에 희망의 나무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드로의 충고는 그 오합지졸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침으로서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다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오래 살아온 노인의 혜안이 번득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도 이렇게 배워야 할 것이 많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 지도자의 조건
이드로의 세 번째 충고는 그의 일을 도울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남들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지도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조금 부족해보이더라도 누군가에게 위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에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는 책임을 맡음으로서 성장할 것입니다. 위임(trust, mandate)은 신뢰를 전제합니다. 이드로가 재판관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 어디 없을까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능력에 덕을 겸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능력은 출중한 데 덕이 없는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정사를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子曰 爲政以德이 譬如北辰居其所어든 而衆星共(拱)之니라)”고 했습니다. 또 “법제로 백성들을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죄를 면하기만 하면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덕으로 그들을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운 줄 알아서 스스로를 바르게 한다(子曰 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이면 民免而無恥니라. 道之以德하고 齊之以禮면 有恥且格이니라[論語, 爲政 1, 3章])고 했습니다. 덕이란 진리에 입각해 살기에 늘 솔선수범하여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덕스러움이야말로 사람들을 바름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재판관은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심없이 판단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신명기 법전에서 모세는 재판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재판을 할 때에는 어느 한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된다면서, 세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이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신1:17)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재판관 자격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참을 위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은 늘 제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1:10)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잘 돌보라고 우리에게 위임해준 곳입니다. 부족하고 약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비전 덕분에 우리 삶은 늘 새롭습니다. 신자의 삶은 위임받은 바를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변혁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질서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땀흘리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덕스러운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를 통해 조금은 따뜻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이 맡겨주신 소명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1월 21일 11시 48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