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 어디 계십니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23:1-10
설교일시 2007/1/28
오디오파일 s-07-01-28.mp3 [625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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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계십니까?
욥23:1-10
(2007/1/28)

[욥이 대답하였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담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이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 때로는 폭력이 되는 종교 언어
오늘 읽은 본문은 욥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졸간에 닥쳐온 고난의 현실 앞에서 욥은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이웃을 잃는 것도 고통이지만, 더욱 큰 고통은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굳건하다고 믿었던 토대가 흔들릴 때 느끼는 당혹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세 친구들의 말은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욥이 겪고 있는 현실의 쓰라림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낡은 말일 뿐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빼앗아 헐벗게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고,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거들먹거리며 살고, 과부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들을 혹사하고 학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사실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이 말은 거짓입니다. 욥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고통받는 이웃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보며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욥의 현실입니다. 욥의 고통을 엘리바스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죄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사회적 불의라는 죄를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언어가 때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슬람권 사람들과 흑인들 혹은 사회의 주변부에 살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런 현실은 그들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겁니까? 거꾸로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의로운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엘리바스는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것을 권합니다.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지요. 엘리바스는 부조리나 불합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겁니다. 세상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늘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구요? 우리 경험은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 탄식과 기도 사이
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님을 향할 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무거운 손으로 자기를 누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23:4) 지금 욥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니라 선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물음표가 되어 서 있습니다. 시인 김승희는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현실을 현실로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 묻고, 도전하고,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죄없는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야 합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왜 어떤 이들은 의료의 사각지대에서 죽어가야 합니까? 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Gaza strip)의 양민들은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합니까? 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빈국의 어린이들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야 합니까?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제기하는 '왜?’라는 질문은 사실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욥의 딜레마는 그가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고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만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뵐 수가 없습니다. 남쪽이나 북쪽으로 가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와의 대면을 의도적으로 피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걸고 있는 이에게 이보다 잔인한 현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日蝕(eclipse of God) 혹은 하나님의 不在(absence of God) 경험이야말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재난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현존을 늘 경험하며 사는 것일 겁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의 축복문에 그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런 복이 우리 모두에게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무심하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두 가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욥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해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 확신의 토대
지난 월요일(22일) 우리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이자 현자였던 한 위대한 영혼을 잃었습니다. 그는 피에르(Abbe Pierre) 신부입니다. 그는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쉼터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하고,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쳤던 위대한 혼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겁니다. 저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꽤 오랫동안 그가 이 세상에 밝혀놓고 간 빛에 대해 명상했습니다. 그는 “산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용맹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반석 위에 생의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생의 비밀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앙생활의 핵심은 세 가지 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내 신앙의 첫 번째 토대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확신이다. 두 번째 토대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세 번째 토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확신이다.”(피에르, <<단순한 기쁨>>, 마음산책, 101쪽)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런 근본적 확신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는 사자처럼 세상의 불의와 싸우면서 인간 영혼의 등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은 ‘신자’와 ‘비신자’가 아니라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다음 대목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피에르, 앞의 책, 227쪽)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욥을 만납니다. 생이 너무 힘겹고 고통스럽고 억울해서 못 견딜 지경이 된 사람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실감에 우는 사람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야곱은 자기의 지난날의 과오를 다 용서하고 흔연하게 맞아준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부둥켜안는 사랑 안에서 야곱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모든 한은 녹아내렸습니다.

• 주식회사 드림
우리 삶이 토대로부터 흔들릴 때 우리를 붙들어주는 이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들도 물론 고마운 이들입니다. 하지만 말없이 곁에 머물면서 세상이 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사람, 야만적인 세상에서도 여전히 야만적이지 않은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상기시켜주는 사람, 내가 사랑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참으로 고마운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함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가 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강화도 교동 집회에 갔다가 이현주 목사님의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전 주에 교동의 한 교회에서 말씀집회를 인도하신 목사님께서 제가 온다는 말을 듣고 책에 서명을 하여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그 책은 <드림>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다른 책과는 여러 모로 달랐습니다. 책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발행인도 없고 책의 정가도 없었습니다. 책의 뒷날개에 주식회사 드림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주식회사 드림은 태어날 때 이미 모든 것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제 할 일은 도로 내어드리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 사람들이는 만들어가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회사 내규도 없고, 이사진도 없고, 사장도 임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예산도 없고, 기획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창립 이래 여태까지 무언가를 세상에 드릴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이 책도 회사에서 드리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이분들의 실천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깍쟁이처럼 계산하고 따지는 순간 선행의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나누려는 생각만 절실하다면 우리는 줄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록 희미할망정 우리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은 우리가 그 빛을 사랑으로 되비출 때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우리의 속된 삶이 성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1월 28일 12시 18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