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 겨자풀처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4:30-34
설교일시 2007/2/11
오디오파일 s07-0211.mp3 [628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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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풀처럼
막4:30-34
(2007/2/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 비유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져놓고 곰곰이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그 광경을 머리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하면 즉시 금은보화가 떠오르는 사람은 아직 속기(俗氣)를 벗지 못한 사람일 겁니다. 바이킹들이 꿈꾸는 천국에는 낮에는 약탈할 수 있는 배가 있고, 저녁에는 낮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저절로 낫는 곳이어야 한답니다. 제 아내는 천국에는 ‘담배 연기가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릅니다.

여하튼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 하고 총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언어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체험을 담아낼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은유적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여호와는 나의 빛’,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 ‘여호와는 나의 힘과 노래’, ‘여호와는 나의 산업’, ‘여호와는 나의 분깃’….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서술도 묘사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경험한 것을 그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유로만 나타날 뿐 ‘서술’이나 ‘묘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라볼레 parabole’는 옆에 던져놓는다는 뜻의 ‘파라발로 paraballo’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비유는 어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형식입니다. 예컨대 “그 사람은 곰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곰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긴 게 곰같다는 말도 아닐 겁니다. 다만 그가 하는 짓이 이해타산에 빠르기보다는 우직하다는 말일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련하다는 말도 되겠네요.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볼 때 늘 명심해야 할 것은 ‘비유점’이 어디에 있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겨자풀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 왜 하필이면 겨자풀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잠시 생각에 잠겨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윽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늘 듣던 말씀이니까 여러분은 이게 충격적인 비유라는 사실이 별로 실감이 안 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청중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비유였습니다. 하고많은 것들 가운데 하필이면 겨자씨라니요?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작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왔습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예루살렘이 세계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백향목에 빗대기를 좋아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이스라엘의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겔17:22-23)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위세 있는 백향목이었습니다. 백향목은 성전이나 제단, 궁전을 짓는 데만 사용하던 최고급의 나무였습니다. 척박한 땅에 사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백향목은 그야말로 위풍당당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향목의 상징을 폐기하고 겨자풀의 상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왠지 왜소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겨우 겨자풀이라니요? 사실 겨자풀은 크게 자라봐야 3m 정도입니다. 그러니 새들이 가지에 둥지를 틀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겨자풀은 번식력이 좋아서 급속히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민들이 기피하던 식물입니다. 대체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하나님 나라를 겨자풀에 비긴단 말입니까?

• 백향목 세상의 전복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도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백향목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 강력한 군사력은 물론이고 화려한 문화는 지금의 우리가 봐도 충격적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로마의 이면을 보고 계셨습니다.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피식민지 백성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 끊일 새 없는 전쟁…. 함석헌 선생님은 “전쟁은 사치 가운데 가장 큰 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치란 분수에 지나치게 치레하는 짓을 말합니다. 그러니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할 돈과 힘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사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백향목 세상은 몇몇 특권적인 사람에게만 천국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런 현실에 눈 뜨기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혹한 식민 통치자들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의 도식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봅니다. 지배의 주체가 바뀐다해도 그 속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그런 백향목들의 세상을 전복시키기 원하셨습니다.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몫을 살아내는 세상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척박한 땅에서도 억센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겨자풀의 예를 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잘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잡초와 같은 사람들이 열어가는 현재 시제의 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지금 여기서 평화를 위해 땀 흘리고, 지금 여기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모자란 구석이 많은 우리가 함께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겨자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겨자풀은 번식력이 강하고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자기 밭이나 정원에 그것을 가져다가 심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겨자씨가 저절로 퍼지는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누군가가 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적인 수고와 땀 흘림을 통해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126:5-6)

비록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등불 하나를 밝히는 심정으로 나눔과 섬김과 치유와 사랑의 씨를 심는 사람들이 있어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크고 번듯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겨자씨처럼 우리가 척박한 토양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마음으로 산다면, 백향목 같은 사람들만 높임 받는 세상도 변화될 것입니다. 며칠 전 판화가인 이철수님의 글을 읽다가 이런 대목을 만났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쟁이는 원고료가 너무 많으면 그렇게 많은 돈은 못 받는다고 사양하신다네요. 원고지 한 장 메꾸는 값이 양파 한 수레와 같으니 손끝을 까딱여 받는 수고비로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라고 했답니다.
-받아서 어려운 데 주지… 하시는 이도 계십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정답을 찾기가 어려운 문제인 듯 합니다.
-제 손으로 지은 쌀을 어려운 이들을 위한 시설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유기농 쌀을 시설에 보내게 된 일을 두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그 쌀을 팔아서 일반 쌀을 사주면 곱절은 보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지요. 터무니없는 말씀은 아닌 듯도 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의 대꾸가 좀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좋은 쌀 좀 먹으면 안 되나요?” 해답은 없지만 마음은 통한 셈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는 거지요, 뭐.>(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중에서)

그래요. 그렇게 한번 살아보는 겁니다. 조금 미련해 보이고, 더뎌 보여도 그게 하나님 나라의 마음일 겁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보듬어 안는 게 혁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편이니 내 편이니, 미우니 고우니 하고 사람들을 자꾸 가르지 말고 그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보듬어 안을 때 세상은 달라질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백향목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겨자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예수님의 유머입니다. 해학과 웃음으로 굳은 세상 질서를 전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간을 넓혀가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든 그 그늘 아래서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백향목이 되라시면 우리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겨자풀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지금부터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파종자입니다. 그 놀라운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2월 11일 13시 26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