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 주의 발 아래 앉아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10:38-42
설교일시 200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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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발 아래 앉아
눅10:38-42
(2007/2/1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예수 운동의 전초기지
설날을 한자로는 元旦 혹은 愼日이라고 합니다. 원단이라는 말은 한 해의 첫 아침이라는 뜻이겠고, ‘삼갈 愼’ 자를 쓰는 신일이라는 말은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들 속에는 한 해의 첫날을 잘 살아야 그 해를 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 꿰야 옷을 잘 입을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나오신 여러분은 원단을 잘 보내고 계십니다. 설날이 되면 수많은 마르다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합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오늘 저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자매의 이야기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 집에는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보다시피 나사로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올리브산의 남동쪽 사면에 있는 작은 마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마을을 엘아자리아(El-Azariya)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셨다가도 베다니 마을로 물러나 밤을 지내곤 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셨던 주님께서 마음 편히 지내실 수 있는 집(home away from home)이었다는 점에서 마르다의 집은 예수운동의 전초기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예수 운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이들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님은 자기 삶의 자리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그분의 후원자가 된 이들을 가리켜 ‘시름하는 동조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유랑하는 떠돌이 설교자인 예수를 따라 나선 이들도 위대하지만,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이들도 위대합니다. 누가는 자기의 복음서 8장 1-3절에 많은 여성 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한 후에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와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을 가리켜 ‘밥상공동체’라 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여러 가지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장벽을 가로질러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편견없이 당신의 식탁에 맞아들이셨습니다.

• 마르다의 봉사
로잘린드 마일스(Rosalind Miles)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한 권 냈는데, 그 제목은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입니다. 이 책은 여성의 시각으로 세계사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가 가능했던 것도 여성들의 말없는 봉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마르다는 사회성이 강한 성숙한 여성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려다보니 일손이 부족했겠지요?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얄밉게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철없는 동생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리아를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철없는 동생을 좀 꾸짖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회의 관행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출신 배경을 설명하면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22:3)고 말하는 데, 여기서 말하는 ‘문하’라는 말은 발 아래를 뜻합니다. 유대의 랍비 전통에 의하면 오직 남성 제자들만이 스승의 발 앞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책망하는 것은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다는 사실도 있지만, 여성인 마리아가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예수님의 제자인양 처신한다는 사실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다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르다가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접대하는 일로 번역된 ‘diakonia’는 봉사라고도 옮길 수 있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삶은 참 분주합니다. 분주하다보면 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다시피 ‘잊을 忘’과 ‘분주할 忙’은 글자 성분이 같습니다. 두 글자는 모두 망할 亡과 마음 心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거기에서 이런 교훈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분주하게 지내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당장에 화급한 일에만 매달리다보면 정작 더 소중한 일은 잊기 쉽다는 말입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함에 쫓겨 예수님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할 수 있는 제일 큰 봉사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었습니다.

• 마리아의 봉사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참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는 기민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전심을 다하여 들었습니다.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얀 브뤼겔(Jan Bruegel)이 함께 그린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예수>라는 그림은 그 광경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마르다가 예수님의 앞에 있습니다. 옷소매를 걷어붙인 것으로 보아 그는 부엌일을 하다 나온 게 분명합니다. 그런 마르다가 마리아를 가리키며 예수님께 뭐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마르다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그의 오른손은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표정입니다. 주님을 향해 갸웃이 숙여진 마리아의 표정은 관상적 도취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달고 오묘한 말씀에 취한 상태입니다. 이 인물들 앞으로는 각종 새들과 짐승들이 마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게 흩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제일 큰 대접은 전심을 다하여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저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애를 쓰는 몇몇 교우들을 보면서 큰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림 속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마리아는 사회가 부과한 자기의 한계에 갇히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사고하는 주체로 서고 있습니다. 論語 學而 篇 2章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하나니라.” 군자는 근본을 닦는 일에 힘을 쓰는데, 그렇게 해서 근본이 든든히 선 이후에야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근본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이 우리의 존재를 꿰뚫도록 허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모든 봉사활동의 바탕이 되어야, 우리는 쉽게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내적으로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의 시를 들어보십시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흐르는 물에 우리 얼굴을 비추어볼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뭔가에 쫓기듯 분주할 때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 오늘의 교회
누가는 10장에서 그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의 일단을 우리에게 슬쩍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공동체에서든 발견되게 마련인데, 사랑과 봉사만을 신앙생활의 본령인양 생각하는 행동주의파와 기도와 관상생활에만 치우치는 은혜파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랑과 봉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통해서 봉사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도생활에 맛들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봉사 활동과 은혜의 추구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수레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말씀을 듣고 주님과 깊이 사귀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도 많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활동으로 분주합니다. 사실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수 출입국 관리소에 수용되었던 이주 노동자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면서 왜 지금까지 이주노동자들의 눈물과 한숨에 대해서 이다지도 무심했던가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의 장벽으로 말미암아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픔입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돕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일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는가”입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나머지는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자기 연민과 불평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주셨습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일과 싸우는 태도로 살지 않습니다. 일이 곧 기도가 되도록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하는 일만이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이 다가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을 꿰뚫어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림)

1628년, 더블린,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등 록 날 짜 2007년 02월 18일 12시 27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