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 불붙은 가시떨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3:1-5
설교일시 200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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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가시떨기
출3:1-5
(2007/2/25)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 회한의 심연에서
‘물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이집트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유모 역할을 했던 친어머니 요게벳을 통해서 모세의 내면에는 히브리인의 정체성이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었을 겁니다. 사람은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유년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때가 묻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아이’로서의 자신과 화해하면서 성장해갑니다. 유년 시절에 가정에서 누리는 정서적 안정감이 그의 삶의 자양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인 것도 그가 히브리인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격분에 못 이겨 저지른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그는 광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머물면서 그는 그곳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자로부터 목동으로의 전락, 회한과 상실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동족인 히브리인들은 여전히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내인 십보라와의 사이에서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아내도 아들도 그의 가슴에 박힌 아픔을 씻어내 줄 수 없었습니다. ‘게르솜’은 ‘황무지에 사는 손님’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 속에는 모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양떼를 몰고 물과 풀을 찾아 그 뜨거운 광야를 걸어가면서 이따금씩 눈에 띄는 가시떨기를 보면서 어쩌면 한숨을 내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가시떨기, 또 아무 쓸모도 없는 그 나무야말로 모세 자신의 모습인 듯 보였을 것입니다. 장년의 모세, 그는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50대들이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은 저 나름의 생활에 분주하고, 직장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이고, 건강의 이상 징후가 자주 나타나고, 머리카락도 성기어지고, 가만히 돌아보면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들의 기대에 따라 처신해왔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 보입니다. 가시 떨기,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광야에 살던 모세의 자화상이요, 이 시대 중년들의 모습입니다.

• 신을 벗는다는 것
어느 날 모세는 불에 타는 듯한 가시떨기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메마른 광야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뜨거운 사막 바람에 바짝 마른 가시떨기가 자연발화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불붙은 가시떨기가 소멸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모세는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지 알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그 떨기나무에 다가갔습니다. 그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엉겹결에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비상한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야훼 하나님과의 만남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요? 신은 어쩌면 우리가 구성해온 삶 자체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력서’ 할 때 ‘履’자는 ‘신’ 또는 ‘밟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력서란 내가 지금까지 밟아온 삶의 내력을 기록한 문서라는 뜻이 됩니다. ‘신’은 그러니까 외적으로 드러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말입니다.

분석 심리학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나체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요구하신 것은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아를 내려놓지 않고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회적 신분도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 여기는 희망과 절망, 경험과 지식, 소유조차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 앞에 경배를 하려는데 천사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쳤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데 왜 그러냐고 항의하자 천사는 “네가 왕관을 쓰고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것이냐?” 하고 책망합니다. 우리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신’을 벗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 하나님의 현존 장소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 장소가 가시떨기였다는 사실입니다. 호렙산 주변의 미디안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키가 작은 관목류인 이 가시떨기는 참 보잘 것 없는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시떨기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보잘것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역살이를 하고 있던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과 탄식소리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저리게 하는 또 다른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시떨기 가운데 머무시면서 그 나무를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나무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나무가 되지 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픔 속에 화육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최근에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요한복음> 강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들어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도올 선생은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데, 그것은 적절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호전적인 하나님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존폐를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을 부족적인 신(tribal God)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목욕물을 버린다고 그 속에 든 아기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 불붙은 가시떨기로 살기
그렇다면 가시떨기 속에 임하신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시떨기 속에 임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우리를 외면하시는 일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신을 벗었던 모세처럼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조차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가시떨기 안에, 나의 상처, 나의 불안, 나의 공허함 가운데 계십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있는 나약함과 비루함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으실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 삶은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모세가 가시떨기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과의 만난 사건을 ‘문지방(門地枋)을 넘은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문지방을 보기 어렵지만, 옛날 초가집이나 한옥에는 문설주 사이의 문 밑에 나무를 가로 놓아 문지방을 삼았습니다. 그것은 안과 밖을 가르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든 밖으로 나가든 문지방이라는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종교학에서 문지방을 넘는 체험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철저한 변화를 뜻합니다. 모세는 가시떨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과 만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지내온 좌절과 실의의 시간은 지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희망과 책임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요즘 박어진이라는 주부의 글을 즐겨 읽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배달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8년 동안이나 일하던 직장을 겉으론 호탕하게, 속으로 부들부들 떨며 직장을 그만둔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걷자, 웃자, 놀자’의 구호를 꽤나 성실하게 실천했다고 자평했습니다. 그는 퇴직 2년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에 불려 다니던 ‘종대 삼촌’처럼 자기도 마을의 여유분 노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동네에서 잠깐 아기 보기 서비스. 무료 영어회화 강사, 미등록 불법 체류 여성 노동자들의 상담 도우미 훈련 받기. 생각해보면 할 일이 참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시지요.

“이제부터 내 쓸모는 내가 결정한다. 숨어 있던 잠재능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할지도 몰라. 반드시 겸손해야 할 만큼 잘나지도 않았으니 이 또한 자유 아닌가? 나는 진화하고 있다. 지난 50년과 전혀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내 야심, 달성 가능할 것 같다.”(한겨레, 2007년 2월 21일자, 박어진의 여성살이 중에서)

멋지지 않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의식하든 안 하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도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땅에 묻어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봄 바람이 불자 벌써 나무에 움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비록 마른 등걸 같은 우리들이라 해도 하나님의 기운이 임하면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불붙은 가시떨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멋진 꿈을 품고 사순절 순례의 길을 잘 걸어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2월 25일 12시 26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