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 생명의 일꾼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6:27-31
설교일시 200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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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일꾼들
눅6:27-31
(2007/3/4)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 봄은 봄이로되
올 겨울은 1904년에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답니다. 없는 살림에 포근한 겨울은 선물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급격한 기후변화가 우리의 방만한 삶에 대한 경고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미풍과 함께 다가온 봄기운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치듯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면서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사람일 겁니다. 시인 이수익은 <한 잔의 기쁨 위에>라는 시에서 이 시절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나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어린 것들, 약한 것들일수록 더욱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초봄에는 왠지 우리 마음이 말랑말랑해집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겨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대감(hostility)이 만연하고 있다고 염려합니다. 인기있는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빈발하고, 인터넷에는 타인을 비방하는 악플이 난무합니다. 이런 적대감의 뿌리는 아마도 불신일 겁니다. 불신의 공장은 정치라고 해야 할지 욕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둘 다일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많은 경우에 폭력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오물을 함께 뒤집어 쓰는 것 같아 불쾌해집니다. 폭력에 오래 노출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굳어지고 거칠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우리의 말살이도 표정도 거칠어졌습니다.

게다가 욕망의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살고 있는 우리 처지이니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습니다. 바라는 게 많을수록 우리는 이웃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쉽고, 그러다보니 삶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얼마 전에 네팔에 다녀온 선배 한 분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네팔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사진 속의 그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정말 순수해 보이는 웃음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네팔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웃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자본주의에 덜 오염되었기 때문일까요? 정다운 사람 만나기 어렵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어렵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바보 취급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 그 상황을 깊이 돌아보기보다는 어떡하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힘들게 하려고 머리를 짜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마당의 일상적 풍경입니다.

• 문제는 마음
그런데 우리는 전혀 새로운 요구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가 길이라고, 진리라고,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권고입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조금 난감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가 나나 내 가족에게 커다란 위해를 가했다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도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중국의 루쉰(魯迅, 1881-1936)은 사람을 무는 버릇이 있는 개가 물에 빠지면 건지려 하지 말고 그놈이 뭍으로 올라오기 전에 흠씬 두들겨 패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진 개’와 같은 자들이 마음을 돌이키기 전에는 절대로 온정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루쉰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점층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사람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를 앙다물고 참아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을 선대하고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보다 우리의 정신이 더 커지면 됩니다. 인도의 성자인 썬다싱은 여러 번 설산을 넘나들며 고지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초인적인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 험준한 설산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산을 오르기 전에 마음의 키를 산보다 높게 하면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갈대라 했습니다. 사람을 없애기 위해 우주 전체가 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방울의 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유한하지만 무한을 가슴에 품을 수 있기에 인간은 위대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만나도 마음 하나 먹기에 따라서 천국을 경험할 수도 있고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좁게 쓰면 미움과 분노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욕과 폭력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사실은 허약한 사람들이고, 길을 잃은 사람들임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해 두려워하기를 그치고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 생명의 지지자
미국 알라바마주 셀마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기마경찰들에 의해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들이 구타를 당했습니다. 경찰은 두 시간 동안이나 앰블런스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격분한 앰블런스 운전사가 셀마로 직행하여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에벤에셀 침례교회 바깥에 있던 군중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알라바마 주 경찰들과 그 지역 보안관인 짐 클라크가 이끄는 경찰 병력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흑인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노래를 부를 때입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복음성가 가사를 바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그 곡조를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당신들은 마틴 킹을 사랑합니까?”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그는 마틴 킹이라는 이름 대신 남부 기독교 지도자 연맹에 속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당신들은 을 사랑합니까?”라고 물었고, 군중들은 그때마다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화답했습니다. 일치의 마음이, 새로운 용기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군중들은 주저하면서도 “무…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또 다시 “당신들은 짐 클라크를 사랑합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훨씬 크게 노래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들의 미움을 긍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때 제임스 베벨 목사가 나와서 군중들에게 짐 클라크를 패배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이 변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월터 윙크, <<예수와 비폭력 저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년, 78-9쪽)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생명을 지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록 작다 해도 생명의 표지들을 일으켜 세우고 지지하고 육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도봉산에 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마을 입구의 화단에는 이런 내용을 담은 표지판이 서있습니다.

“밟지 마세요. 보이지는 않아도 지금 이곳에서 생명의 싹이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 표지판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렘을 느낍니다. 평화의 새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분명히 자라고 있습니다. 어느 집 우편함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 편지함 위에 우편물을 올려놓아 주세요.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어요. 열어보고 싶으시죠? 그렇지만 어미 새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배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평화의 새 시대를 여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보자기로 주먹을 이기듯이 열린 마음,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거친 세상을 이기는 궁극적인 힘입니다.

• 마음의 보물
그러나 누구를 대하든 사랑으로 응대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지속적인 폭력과 거짓 앞에서 사그라지고 맙니다. 분노와 화가 우리 이성의 둑을 넘을 때 우리는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응징하려 합니다. 모든 인내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실패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불의를 감내할 줄만 알았지, 그것을 풀어낼 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수구가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수구는 받는 구멍도 있어야 하지만, 받아들인 것을 더 큰 곳으로 돌려보내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속을 깊이 뚫어 하나님과 통하는 길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뚫어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이웃들을 외면하고 짓밟고 비판하고 비웃으려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주도 해녀들에게는 오직 장녀에게만 상속되는 바다 속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합니다. 평소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지만 집안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가장 소중한 사람이 왔을 때만 찾아가 접시만한 전복을 따는 자리라 합니다. 삶이 아무리 척박하고 물질이 제아무리 신통찮아도, 바다 속 어딘가 감춰둔 보물 창고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에 등불이 환하게 밝아오게 마련입니다.(정민,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 62-65쪽)

우리에게도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보물 창고가 있는지요?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신 주님이 우리의 보물 창고입니다. 세상 사람이 뭐라 하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고후4:7)이라 했습니다. 이 보물이 우리에게 있는 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요구도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삽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선물을 안겨주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 왔다가 우리의 ‘일그러진 자아’와 만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돌아가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이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과 만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가 비록 거친 사람이라 해도, 비록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 해도 우리가 그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도 변화될 것입니다. 너무 낙관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비록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의 속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음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으로 대할 때 그의 속에 잠들어 있던 그 형상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역사의 새 봄을 열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3월 04일 12시 30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