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환대의 공간 만들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0:40-42
설교일시 2007/03/11
오디오파일 s070311.mp3 [655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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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공간 만들기
마10:40-42
(2007/3/11)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제자의 길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 할 수 있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는 이제 세상에 나아가 온갖 질병과 허약함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주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대가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지시는 또 있습니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야 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니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돈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대신 전적으로 가난해지고 취약해져서 누군가의 호의에 의지해 살라고 하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 하지만 대가는 받지 말고, 사람들의 호의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 참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게 될 여러 가지 환난과 박해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한 꽃동산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이렇게 쉽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삶과 메시지가 그 당시의 유대교의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호흡할 때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 호흡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삶인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 지키기와 성전체제에 대한 경외심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뿌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뿌리를 뒤흔드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모두가 믿던 세상에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46년이나 공들여 지은 성전을 두고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삶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의 없이 따르는 길에서 벗어난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엇’입니다. ‘엇박자’니 ‘엇나가다’느니 하는 말은 다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는 리듬이나 질서를 깨뜨리고 비뚜로 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엇나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질서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엇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새로움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강고한 유대교의 질서에 틈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의 구름이 몰려왔을 겁니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주님은 지금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10:30) 제자들의 가슴에 어떤 불꽃이 지펴지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그 마음에 지펴진 불꽃으로 몸과 마음을 덥히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 따뜻한 사람을 찾아서 말입니다.

• 맞아들임
기존질서에 대한 엇박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맞아주는 사람들은 대개 그 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르는 곳마다 밑바닥 사람들은 기쁨과 설렘으로 그들을 영접했지만, 지배계급들은 예수를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체제의 미움을 받은 이들을 영접한다는 것, 이것은 위험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습니다. 위험한데도 받아들여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요. 그렇기에 주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40)

‘너희’는 제자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이제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위임하신 일을 수행하는 ‘사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의 위임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논리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논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정당하게 권한을 위임받은 사자는 “그 사람 자신과 같다”고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을 ‘샬리아흐’(shaliach)라 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누군가를 맞아들인다(dechomai, dechetai)는 말은 단순히 집으로 모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와 그의 메시지와 구원사역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기존질서에 틈을 만드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행위는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 사도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유대인들이 그 도시의 불량배들을 사주해서 소요를 일으킵니다. 불량배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야손과 신도 몇을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그들을 고발합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6b-7a)

여기서 사도들은 ‘세상을 소란하게 한 사람들’이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엇’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권력과 지배와 폭력으로 질서화된 세상에서 사랑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지배자들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야손의 죄는 그 위험한 사람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들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실존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 복 짓는 마음
오늘의 본문에서 맞아들임의 대상은 예언자와 의인과 작은 사람인데, 주님은 그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자(phrophetes)는 구약에 등장하는 이들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신자들을 격려하는 일을 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그런 이들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일에 공감하고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들도 예언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화육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고, 셋째는 선포된 말씀인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선포된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포하는 이와 동일한 상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의인(dikaios)은 세상에 나가 말씀을 선포하는 소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존중받던 기독교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뵈뵈와 같은 이들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뵈뵈를 천거하면서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롬16:2) 하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만한 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 의인이 받는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말씀은 더 구체적입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작은 사람(mikroi)은 경험이 많지 않은 초보 전도자를 뜻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자칫하면 미숙하다 하여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무도 그대가 젊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도리어 그대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십시오.”(딤전4:12) 비록 어리고 미숙하다고 해도 그들이 주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 맞아들이고 존중하는 사람은 절대로 상을 잃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는 것은 건조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그네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작은 정성이 복 짓는 마음임을 잊지 마십시오.

•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
그런데 말해야 할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이들을 잘 맞아들이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로 화육하여 들어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잘 맞아들이는 일은 더욱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잘 아는 사람,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에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가난한 노숙인의 모습으로도 오시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으로도 오십니다. 새터민의 모습으로도 오시고,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도 오시고, 1년 넘게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KTX 여승무원들의 모습으로도 오십니다. 익숙한 ‘우리’ 말고 낯선 ‘그들’을 위해 우리가 마음을 열 때, 그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줄 때 우리는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낯선 이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열어야 하는 것은 우리 집 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낯선 이들을 될 수 있으면 외면하고 살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그들과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생활은 그런 안이함에서 벗어나 그들과 연루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삶에 연루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증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 신부님은 제가 참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다친 새 한 마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그림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손의 주인공은 혹시 새가 떨어질까봐 손을 많이 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혹시 새가 짓눌릴까봐 꽉 쥐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손은 보금자리처럼 새를 지탱하고 붙잡아 주며, 따뜻하게 해 주고 안정감을 줍니다. 다친 새는 때가 되면 다시 기운을 차리고 날 수 있을 것입니다.”(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2002, 홍성사, 59-60쪽)

이 마음이 그분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이들을 맞아들이고 존중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사람들, 특히나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위해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귀한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기의 문제에만 붙들려 있다보면 마음은 여백을 잃어 점점 각박해지고, 표정은 어두워지게 마련입니다. 누군가가 다가와 편히 쉬고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열면 우리 생의 문제도 가벼워질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길에서 동행하게 된 낯선 분을 집으로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식탁을 차렸습니다. 그가 기도를 드리고 떡을 떼자 그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존재 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을 모신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주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해 마음을 여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그런 여정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3월 11일 12시 34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