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 끝내 가야 할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13:31-35
설교일시 2007/03/18
오디오파일 s070318.mp3 [7109 KBytes]
목록

끝내 가야 할 길
눅13:31-35
(2007/3/18)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알,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헤롯 안티파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언어로 규정해놓은 대로 만나거나, 그가 제시해주는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봅니다. “저 사람은 위선자야”, “저 사람은 음흉해”, “저 사람은 인간 말종이야”. 이런 평을 듣는 사람과 만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어떤 언어로 가둬버리는 것처럼 가혹한 일이 없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Mensch-sein ist Mensch-werden)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물론 살아온 삶의 관성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지만, 누구라도 변화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를 어떤 말로 규정해버리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바리새파 사람’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맞습니다. ‘위선자’의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위선자이고, 예수님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느 날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존경하기에 그를 돕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이 말썽 많은 사나이를 갈릴리로부터 몰아내기 위해서 헤롯과 공모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누가가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 다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도 선의를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헤롯의 의중을 꿰뚫고는 예수님에게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출신의 아내인 말다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이 그 땅을 분할해서 다스렸는데, 주후 6년에 폐위된 아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아(에돔)를 다스렸고, 필립은 게네사렛 호수 북동쪽인 드라고닛을 다스렸고,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성서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헤롯은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나바테아의 공주와 결혼을 했지만 동생인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다가 세례자 요한의 책망을 받고는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분봉왕으로 봉해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갈릴리 바닷가에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그 일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동원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미워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갈릴리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이가 다시 나타난 겁니다. 그는 예수라는 사나이가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의 혼에 지핀 것이 아닌가 하여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폭발하기 쉬운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가 예수라는 도화선과 연결될 때 자신의 자리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폭력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는 예수를 제거하고 싶은 유혹에 흔들렸을 겁니다.

• 단절 혹은 열림
그런 헤롯의 의중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내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헤롯을 ‘그 여우’라고 지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그를 두고 ‘여우’라고 표현하셨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러셨다면 그건 그다지 좋은 표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민중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비굴하고 교활하지만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잔인했던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고 그것을 누가가 차용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태연자약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32)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두 가지 중심축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떤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일을 중단하실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이에게 죽음은 이미 위협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지켜야 할 ‘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으려는 헤롯의 뜻은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주군과 순천시에 걸쳐 있는 조계산은 산 이편과 저편에 유명한 사찰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계종의 승보사찰인 송광사이고 다른 하나는 태고종의 선원이 있는 선암사입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향하는 조계산 자락은 호젓하고 아름답습니다. 17년 만에 그 산을 다시 넘었습니다. 편백나무 숲과 조릿대 군락지는 산천이 의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홀로 산을 넘는 동안 저는 전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 있는 돌멩이 하나 풀포기 하나마다 크레타인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고 했는데,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지간히 큰 바위나 깊은 웅덩이, 특이한 형태를 한 나무 옆에는 어김없이 그곳에 얽힌 민담이나 전설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괸 돌 이야기가 제게 생각거리를 주었습니다.

조계산의 산중턱에 수도자 한 사람과 마군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군(魔軍)은 진리의 길을 가는 이들을 괴롭히고 헤살놓는 존재입니다. 마군은 어떻게 해서든 수도자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만 산 이편과 저편에 있는 스님들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군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커다란 바위를 굴렸습니다. 서로 오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수도자는 조그마한 바위 하나를 굴리면서 네가 가서 저 큰 바위를 막아달라고 기원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던 작은 바위가 마침내 큰 바위를 가로막자 큰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고인돌 모양으로 서있는 괸 돌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 마군은 자취를 감추었답니다.

마군이란 결국 뭘까요? 사람들의 소통을 가로막는 것일 겁니다. 소통이 막힘은 죽음입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큰 돌 밑으로 굴러가 불통의 위기를 막은 작은 돌, 그 돌을 통해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숨통을 죄는 세속적인 권력에 틈을 만들고 그 흐름을 뒤바꾸기 위해 당신을 바치셨습니다.

• 경계 넘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전율을 느낍니다. 어떤 방해가 있다 해도, 어떤 위협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부르신 그 길로 가고야 말리라는 굳은 다짐, 죽음의 위협조차 가로막을 수 없는 이 확신이야말로 죽음을 이기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끝내 가야 할 길과 만나셨습니까? 작고한 시인 김남주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용기를 잃지 말고 전진하자고 동지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어기어차 넘어 주고/사나운 파도 바다라면/어기어차 건너 주자”.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이미 그 목표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신명에 지펴진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장벽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환경부와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반달가슴곰 새끼 3마리를 야생에 적응시키기 위해 지리산의 어느 구역에 울타리를 치고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놈들이 사라졌습니다. 지리산 구석구석을 뒤진 끝에 간신히 찾아내 다시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고는 CCTV를 설치해놓았습니다. 며칠 후 세 놈이 또다시 우리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한 놈은 땅을 죽도록 파고는 그 구멍으로 나가고, 다른 두 놈은 서로 힘을 합쳐 나뭇가지를 당긴 뒤, 그 위를 줄타기를 하듯 넘어갔습니다. 울타리 안이 좁은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위험한 곡예를 한 까닭이 뭔지 아십니까? 놈들을 탈주자로 만든 것은 가을 지리산에 지천으로 달려있는 산열매들이 익어가는 냄새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그 짜릿한 감각에 몸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열매 냄새에 이끌려 울타리를 넘었던 반달가슴곰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지펴 그렇게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죽음은 갑작스런 변고가 아니라, 그가 끝내 가야만 할 길이었던 것입니다.

•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哀歌)
예수님이 걷는 길의 끝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번제단이라는 뜻의 아리엘(사29:1), 다윗 성, 시온, 신의 동산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운 그 도시가 예수님의 발걸음이 멎는 곳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본래 살리고 북돋는 일을 본령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권력으로 바뀔 때 종교는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시인 정현종은 “權座는 저주의 수렴이고, 치욕의 원천이고, 강력한 汚點”이라고 했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종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룩은 낮아짐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예루살렘의 비극은 낮아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겸손과 성실과 섬김이 아니라 음모와 술수 그리고 종교적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땅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두 팔을 벌려 예루살렘을 품으려 하셨지만 그들은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곳이야말로 당신 인생의 마침표가 될 것임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 눈에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확연히 보입니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35)

예루살렘의 파멸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요? 주님의 얼굴빛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는 때가 오면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전쟁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의 두려움과 고통을 이해할 때, 가로막힌 소통의 통로를 열기 위해 위험과 고통을 받아들일 때, 서로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한걸음 다가설 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라 하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하신 주님이 앞장서고 계십니다. 자아의 감옥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걸으십시오. 그래서 영혼의 새 봄을 만끽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모두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3월 18일 12시 37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