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그러나, 그러므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엡2:1-10
설교일시 200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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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므로
엡2:1-10
(2007/3/25)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 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하나 되게 하는 님
벌써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많이 가벼워지셨습니까? 많이 맑아지셨습니까? 어느 분은 사순절은 “초점을 바로잡는 때요 진리의 자리에 다시 들어서는 때이며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되찾는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앉는 시간이 많아져야 하는 데 우리의 일상은 좀처럼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은 늘 들떠 있고, 그 때문인지 무지근한 느낌이 영 가시지를 않습니다. 일상의 흐름을 끊고 우리 삶을 중심이신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성지를 향해 엎드리는 무슬림들의 모습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예전의 그 사람일 수 없습니다. 갈릴리의 어부 시몬은 사람을 낚는 어부 베드로가 되었고, 박해자 사울은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는 과거에 속했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온전히 가난해져 주님만을 따랐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몽당연필이 되어 살았습니다. 우리 삶은 어떻게 변했나요?

에베소의 저자는 성도들이 과거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죽음은 대개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무엇이 이런 분리를 낳았을까요? 이사야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59:2)고 했습니다. 죄는 소외(疏外, alienation)시키는 힘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켜 서로 버성기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대말은 뭘까요? (무죄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니 말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자기의 지배 아래 두려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반목하는 사람들이 장벽을 헐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는 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죄와 허물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물에 비친 자기 영상에 도취해 누구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던 나르시소스처럼 자기 사랑(narcisism)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랑이란 자기 초월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연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해서 이 노래를 시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 마음을 부러워할 뿐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애로부터 벗어나 누군가에게 반응을 하며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책임’을 들었는데, 책임이라는 말은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분부를 듣고도 바쁘다는 핑계나 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함께 일하자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미루는 순간, 우리의 영적인 죽음은 점점 깊어집니다. 에베소서는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교만, 불신앙, 끝없는 욕망의 형태를 빌어 나타나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 MBC에서 방영한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낯이 뜨거웠습니다. 유명한 몇몇 목사님들의 거짓말과 위선이 낱낱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웠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망각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선택적 부주의(selective inattention)이라 한다지요? 종이 위에 놓인 쇠가루가 이리저리 춤을 추는 것은 종이 아래서 움직이고 있는 자석 때문이듯이, 죄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뒤집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게 사람이라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영적인 죽음의 자리에 머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그러나’(δε)로 시작됩니다. 신앙의 신비는 ‘그러나’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는 서술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무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능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무능하지 않습니다.

살려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죽어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요? 물론 우리에겐 그런 소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격증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새로워짐입니다. 구원받은 삶이 있을 뿐 구원받은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이런 이해의 차이는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어떤 지위나 상태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적인 삶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 만드는 일에 뛰어든 사람들은 구원을 삶으로 이해합니다.

그제 오전에 최인환 전도사가 대전 외국인 이주노동자 종합지원센터의 소장인 김봉구 목사님을 모시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봉구 목사님은 대학원 졸업 후 이주 노동자들 돌보는 것을 자기 목회로 삼고 일하는 귀한 일꾼이었습니다. 열정 하나로 시작한 일이 지금은 전국에서도 모범적인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대전충청 지역의 외국인 무료진료센터, 대전 국제결혼 이주 여성 지원센터를 통해 그는 이방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서남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 어떤 기관을 설립할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려는 노동자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미리 교육시킴으로써 이곳에 와서 시행착오를 덜 겪게 하고, 또 이곳에서 계약이 만료돼 돌아간 이들이 자기 나라에 잘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곳에 다녀간 이들은 똑같은 노동에 대해 받는 급여 차이가 거의 20배가 되기 때문에 일할 의욕을 잃고, 이곳에서 벌어간 돈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들이 제 나라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매우 긴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현지의 선교사들과 협력하면 쉽게 할 수 있겠다 싶어 상의해 보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일은 선교사의 직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고 했습니다.

김목사님과 선교사들의 차이는 뭘까요? 선교 또는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음을 상태나 지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음을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더욱 중요한 과제로 여깁니다. 이것은 humanism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신 적은 있지만, 믿음을 전제로 사람들을 돌보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하지만 복음전파는 섬김과 돌봄의 삶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6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죄와 허물에 따라 죽었던 옛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의 작품
에베소서는 이런 기독교인의 실존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품은 그리스어로 ‘poiema'인데 이 말은 적절하게 균형에 맞게 시의적절하게 수고하여 만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음과 인자함과 친절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선함 가운데서 빚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당신 아드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2:13)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작품으로 삼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염원하게 되고, 또 그 일을 실천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받은 삶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성숙이라 여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의 사정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깊어지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301호실>이라는 시를 들어보십시오.

부서진 번개불
까맣게 속이 타는 빛의 씨알들/처럼

왜 자꾸만/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이 작은 방에

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뼈 마디마디 울리는 기도들이
하늘도 되돌려주는 기도들이

이젠 세상으로 흩어질 밖에 없어라
어두워 오는 하늘 아래/파아란 횃불로 타오르려고

301호실은 감방입니다. 시인은 어두운 현실을 아파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야 할 기도가 아래로 쏟아집니다. 시인은 이제 이해합니다. ‘아, 이것은 나의 기도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그래서 그는 어두워오는 하늘 아래 횃불로 타오르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이제 은총의 ‘그러나’와 그 응답으로서의 ‘그러므로’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사랑하고, 보듬어 안고, 수고하고, 다가서고, 나누십시오. 안일을 깨고 나아가 불의에 도전하십시오. 그러한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선한 일에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3월 25일 12시 58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