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3.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22:1-11
설교일시 2007/04/01
오디오파일 s070401.mp3 [404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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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시22:1-10
(2007/4/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 조상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주시겠지”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신 분,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맡긴 몸, 모태로부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난이 가까이 닥쳐왔으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 피와 장미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은 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십자가는 한 평생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자기를 버리고 달려온 길의 끝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고독하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이들의 소리는 들려오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어떤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버림받음의 느낌이 이보다 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시인 박두진은 <갈보리의 노래1>에서 그 참상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도 차마 밝은 채로 비칠 수가 없어
낯을 가려 밤처럼 캄캄했을 뿐,

방울방울 가슴의
하늘에서 내려맺는 푸른 피를 떨구며,
(하략)

주님의 가슴에 흐르는 피는 저 무심한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기에 ‘붉은 피’가 아니라 창백한 ‘푸른 피’입니다. 마침내 주님은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현대의학은 십자가 처형의 비인간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강한 채찍질에 의해서 외상과 빈혈증에 의한 쇼크가 생기고, 또한 극도의 호흡곤란이 발생된다. 고통스러운 자세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하게 되고 혈액 속에 이산화탄소를 증가시켜서 결국에는 질식을 유발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십자가에서 고통을 제거해버립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보는 것은 구속의 은혜일뿐, 33살 청년 예수의 고통과 고뇌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조차 주님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값싼 위로와 축복을 구하는 이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스캔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피의 흔적이 배어있는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치장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십자가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억울하게 흘린 피가 아니라 장미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악마적 힘입니다. 십자가에서 부정된 것은 사람을 지으시고 매우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사순절 막바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 던져진 장미꽃들을 걷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폭력성과 우리 문화에 잠재해있는 폭력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국가의 폭력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인류의 고통이 집약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서 주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 왜 하필 시편22편인가?
우리는 이 외침이 시편 22편 1절의 인용임을 잘 압니다. 주님은 왜 이 구절을 외친 것일까요? 왜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고 노래한 시편 23편이나, “주님,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내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나를 건져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 31편이 아니고 왜 하필이면 22편입니까?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영혼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시던 주님이 아닙니까? 지나친 고통이 주님의 믿음과 신뢰를 뒤흔든 것일까요? 그래서 주님은 영혼의 평안이 아니라 혼란에 휩쓸리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가 겪어온 고통을 맛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을 가슴에 품은 채로 살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있던 아픔을 겪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예수님을 절망의 심연 깊은 곳으로 떠밀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과 테러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제도적인 폭력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상당한 사람들, 악마적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에 의해 삶이 유린된 사람들의 아픔을 주님은 고스란히 경험하고 계십니다.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시는’(2) 하나님을 인해 절망한 사람들,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6)이라고 탄식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조롱과 빈정거림에 마음 상한 사람들의 마음 자리에 우리 주님은 서 계십니다. 그렇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부르짖음은 주님께서 인류의 고통에 더 깊이 연루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나는 삶이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읽습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 외침을 들으며 헛된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어쩌면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흥분은 길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도 나타나지 않았고, 기적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적대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실망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에서 아버지로
하지만 진정한 기적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아야 합니다. 신음하던 시편 22편의 기자가 마침내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신 분,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맡긴 몸, 모태로부터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서라 할 수 있는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68:5)라고 표현한 곳은 있지만 직접적으로 아버지라 표현한 곳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삶의 역경에 직면하여 투쟁할 때마다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였습니다. 주님은 생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기성 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의인들’을 귀히 여기시지만 예수의 아버지는 참회하는 죄인과 세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종교 권위자들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멀리하고 심판하지만, 예수님의 아버지는 죄인에게 달려가 손을 벌려 끌어안고 입을 맞추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당신을 맡기십니다. 동시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맡기십니다.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 고통, 고독과 쓰라림까지도 말입니다. 이런 신뢰와 맡김을 통해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부둥켜 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주님은 이미 당신의 몸으로 받으셔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 사정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눈에 가리워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든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야 할 때입니다. 기독교인답게 산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종교적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빵과 포도주를 받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을 기억하면서 삶의 자세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지금도 우리 삶의 주변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그 자리야말로 우리가 주님과 만날 자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 자리에 다가설 때 그들은 마침내 아버지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받는 이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4월 01일 12시 36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