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4. 여자여, 마리아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20:11-18
설교일시 2007/04/08
오디오파일 s070408.mp3 [391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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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마리아야!
요20:11-18
(2007/4/8, 부활절)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으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이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수난의 골짜기를 거쳐 골고다의 십자가로 이어지는 사순절 여정이 마침내 끝나고 우리는 부활의 빛 앞에 서 있습니다. 어둠이 있었기에 빛이 더욱 찬란합니다. 사실 저는 이번 사순절 기간 내내 어떤 영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여수 화재 참사로 죽어간 이주노동자들의 모습,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땅을 치며 우는 팔레스타인 여인의 모습 등 세상의 아픔이 고스란히 저의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니, 에덴의 동쪽에서 벌어지는 이런 참혹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 마음이 참 아프시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최근에는 한미 FTA 체결로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이들의 절규가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득실을 따지는 것은 제몫이 아닙니다. 다만 삶의 의욕을 잃은 이들의 존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고난의 현실이 그치질 않습니다. 나는 부르짖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본 후 당황하며 자기들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간 뒤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없이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난다는 말입니까. 찢긴 시신일망정 수습하여 고이 모시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마리아는 다만 울 뿐입니다. 어느 순간 몸을 굽혀 무덤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주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과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다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봅니다. 마리아는 한 사람이 자기 앞에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만일 당신이 우리 주님의 시신을 옮겨놓았거든 어디에 모셔두었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그 낯선 이가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사랑과 이해와 연민에 가득찬 음성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라부니!”라고 응답합니다.

•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호명행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여자여’ 하고 불렀을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비인격적이고 너무나 일반적인 호칭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비로소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 장면은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요10:3)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이름을 부르자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다수의 대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제각각 유일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의 사정은 주님께 이미 알려졌습니다.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힘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주님을 껴안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만류합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두고 예수의 존재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유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정말 우스운 해석입니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육신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신령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소생(resuscitation)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모든 것이 십자가 처형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전의 인간적인 친밀감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 말입니다. 주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곁에 머무시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부탁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여기서 올라간다는 말은 방위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의 도약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품어 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한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늘 지금 경험되는 실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부활은 예수에 대한 세상의 판결을 원심파기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게 바로 부활절 보도의 정점입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음모, 종족간의 갈등, 전쟁과 테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최후 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폭력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폭력과 거짓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면서 끝없이 연민과 사랑을 선택하는 이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땅 곳곳마다 거대한 분리 장벽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두께 1m, 높이 5-8m, 총연장 700km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 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집의 마당을 가로지르기도 합니다. 집주인들은 자기 마당에 있는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러 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대로부터 특별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장벽에 갇힌 사람들은 그 콘크리트 장벽에다가 낙서를 하고 벽화를 그렸습니다. 주로 막힌 담 너머로 펼쳐지는 초록색 들판이나 바다 그림입니다. 그 장벽에 그려진 벽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중에 기자가 “이스라엘이 이 장벽을 세우는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자 응답자는 웃으며 말합니다. “우리더러 날아보라고!” 가슴 시린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신앙은 바로 장벽이 더 이상 장벽일 수 없다고, 우리는 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평화와 진실과 생명을 가두어두었던 무덤문은 이미 굴려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물과 탄식을 거두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주님의 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기뻐할 수 있는 길은 지금 울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의 가슴에 희망의 기운을 불러넣는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의 이름을 호명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여 세상에 신명을 불어넣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4월 08일 12시 37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