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5. 주께 소망을 둔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일3:1-3
설교일시 2007/04/15
오디오파일 s070415.mp3 [586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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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소망을 둔 사람
요일3:1-3
(2007/4/15)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말을 실감하고 계십니까? 누가 뭐라 해도 이 고백에 흔들림이 없습니까? 사노라면 우리는 크나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눈 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우리 마음은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절실한 시간에 하나님은 부재 중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어제 내 사랑하는 친구이자 형인 김영호 목사의 장례식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동기들이 마련한 조촐한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목도하였습니다. ‘어둠의 눈’과 마주쳤던 것입니다. 전쟁터에 정의는 없었습니다.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벌거벗은 폭력, 그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도 그 제도적 폭력의 한 부분이었기에 그는 평생을 부채 의식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늘이었습니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의 교수이기도 했고, 위스컨신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던 그는 60세가 되던 지난 해 나를 찾아와 베트남에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에 들어가 한국 군인들과 베트남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 소속감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2세들, 라이따이한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잘 돌보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자마자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생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살았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그는 외로웠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와 학계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예수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일 수밖에 없음을 그는 절감했을 것입니다. 저는 홀로 죽음을 맞았을 그의 고독과 혼돈과 아픔을 생각하며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고독한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을까요? 오직 주님의 사랑에만 매여 살았던 그가 이런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신가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독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고독한 죽음을 거울 삼지 않고는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고통과 고독을 고스란히 함께 겪고 계셨다는 말일 겁니다. 가장 깊은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49:15, 16). 이 말씀이 있어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통과 고독은 어쩌면 우리를 하나님께 더 단단히 비끌어매는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김영호 목사가 그 죽음의 자리에서 혼자가 아니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품이 되어 그를 맞아주셨을 겁니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 소명으로서의 자녀됨
오늘의 본문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일반적으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합니다. 참으로 황송한 선언입니다. 세상의 조그마한 물결에도 요동치기 일쑤이고, 여전히 이기심과 결별하지 못하고, 죄의 은근한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는 우리들을 두고 하나님의 자녀라니요? 이것은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초대와 약속에 응하시렵니까?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사랑에 함께 불타오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 말은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indicative)은 명령(imperative)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소명은 부모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고, 비전을 함께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안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116:12) 바로 이 마음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씀이 예수를 닮아가고, 우리의 눈길이 예수처럼 서늘하지만 부드럽고, 우리의 손길이 치유하고, 돌보고, 일으키는 생명의 손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소망입니다.

• 소망을 가진 자의 삶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은 도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이 들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깨끗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마음이 환해지고, 그 사람만 만나면 잃어버렸던 순수함을 회복하게 되는 그런 이들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고, 선포되는 말씀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어느 분은 ‘바라보다’라는 단어는 본래 바라‘를’보다라는 말로 ‘를’이 생략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라는 바라다, 즉 소원입니다. 바라를 본다는 것은 소원하는 바를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보면 그 소원은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바라’는 히브리어로 ‘창조’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해가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히11:1)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마5:8)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뒤집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이라야 그 마음이 깨끗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8:29) 이 말처럼 예수님의 생의 비밀을 잘 드러내는 말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부활절 이후의 삶
근세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황 가운데 한분이 요한23세입니다. 그는 1962년에 바티칸 제2차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 교회를 개혁한 분으로서 유명합니다. 그가 베니스 교구의 대주교였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기 교구의 한 사제가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성직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자주 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권위를 최대한 발동시켜서 그 사제에게 성무집행을 중지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주교는 어느 날 그 사제가 종종 들르는 장소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를 본 사제는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대주교는 자연스럽게 그를 포옹하면서 자기와 주교관에 동행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도착한 즉시 그는 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청하였습니다.
“내게 고해성사를 주십시오.”
대주교는 그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사죄를 청했습니다. 사제가 대주교에게 성사를 주고 난 후에 대주교는 그를 껴안고 말하였습니다.
“나의 아들이여, 제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 심지어 대주교인 나의 죄까지도 사해주도록 그대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을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그대는 그대 생활에서 가능한 한 죄를 피하고 그리스도께 감사의 열정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그래야 우리 삶이 성결해지고, 세속의 파도에 떠밀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없는 은총을 기억하며 늘 사랑의 빚진 자되어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롯이 일치되는 꿈을 가지고 부활절 이후를 살아가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4월 15일 12시 41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