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6. 발걸음을 늦추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10:23-29
설교일시 200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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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늦추고
고전10:23-29
(2007/4/22)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먹으십시오.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여러분을 초대하여, 거기에 가고 싶으면, 여러분 앞에 차려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한다고 하여 묻지 말고 드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의 비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 품이 사라진 세상
분주하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집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내달리는 차를 보면 마음이 참 불편합니다. 하지만 휠체어를 뒤에서 밀며 천천히 나아가는 젊은이를 보면 반갑습니다.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는 노인 뒤에서 마치 그를 보호하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지난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는 까닭은 장애인들이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마음쓰는 것이야말로 인류 진보의 징표라고 저는 믿습니다. 생명을 복제하고, 첨단 무기를 만드는 것이 진보가 아니라, 약자들을 보듬어 안으려는 마음의 확장이 진정한 진보입니다. 도시의 삶의 속도는 장애인들이나 노약자들에게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건널목의 신호등은 그들의 느린 발걸음을 기다려주지 않고, 엘리베이터는 채 들어서기도 전에 닫히곤 합니다. 그러니 산다는 게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팔다리 성한 이들에게 익숙한 속도가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야 하는 ‘차별’을 걷어내고, 장애인도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는 저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저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버려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분이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홀히 여기는 세상은 상황이 바뀌면 아흔아홉 중 누구라도 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스스로 잘난 사람들 곁을 떠나 죄인과 세리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위해 추수 때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입니다(레19:9-10).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1:27)

멀쩡해 보여도 세상에는 영혼이 추운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해달라’는 신호를 주위에 계속 보냅니다. 그 신호는 말일 수도 있고,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을 때 그들은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우렁이 속 같은 자아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들은 간혹 난폭한 행동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누군가의 난폭한 행동의 이면에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대개 내성적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들을 품어줄 품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참혹한 살상극을 저지른 조승희 군도 품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조차도 그의 품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모두에게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다들 바쁘기 때문에 그가 보내는 SOS 신호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 남을 배려하는 자유
삶의 근본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자유라고 가르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 삶에 눈뜬 바울은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고전9:19)이라 선언했습니다. 괜히 해보는 빈말이 아닐 것입니다. 자유함이란 우리가 골몰하던 것들로부터 해방될 때 느끼는 홀가분함입니다. 부자유함이란 거꾸로 뭔가에 붙들린 상태가 되겠지요. 부자유하다는 것은 결국 집착하는 게 많다는 말입니다. 돈에 집착하고, 출세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권세에 집착하고, 쾌락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기 영혼을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집착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다른 것들은 맛을 잃게 됩니다. 찬송 시인은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 없다.”

이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그렇기에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잡혀가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바울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와 들에 핀 들꽃 한 송이 속에서도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이들의 표정은 밝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깊은 만남도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자유의 외형에 집착하는 이들은, 그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라는 이 전칭 명제가 무섭습니다. 자칫 이 말은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행하면서도 그게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릇된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10:23).

자유는 책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의 자유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 교회의 사랑과 일치를 깨뜨린다면 그 자유는 제한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전9:19b)고 말합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아름다움입니다. 섬기는 자유, 종이 되는 자유! 주님도 당신을 비워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보다 깊은 자유는 없습니다. 신앙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맘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자유입니다.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는 문제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고린도에는 이교의 신전이 많았습니다. 신전마다 동물을 잡아 바쳤는데, 먹고 남은 고기는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구입할 때마다 혹시라도 우상 앞에 바쳐졌던 고기가 아닐까 하여 불안해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음식을 너무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먹으라고 권합니다.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앞에 차려놓은 것은 맛있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다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그 음식이 우상 앞에 바쳐졌던 것이라 하여 께름칙한 표정을 짓고 있거든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자칫하면 그 형제가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자기의 자유를 과시하듯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8:1) 했습니다.

• 공동체 세우기
“나의 자유가 왜 다른 사람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 공동체의 책임적인 지체가 되어 그 몸을 세워가는 과정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교회에 다니려고 합니다. 간섭받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리면서 진실한 신앙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기쁨의 순간도 함께 하고, 슬픔의 순간도 함께 해가면서 우리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끼리 분쟁이 생겨 사회법정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전6:7) 이게 천국의 마음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지옥을 만듭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나는 됐다’고 말하고, 불화를 만드는 사람은 제 몫이 적다고 화를 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이 차지해본들 정말 행복할까요? 채근담의 한 구절입니다.

소롯길이 좁거든 한걸음 머물렀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라. 맛진 음식을 먹게 되었으면 삼 분쯤 덜어내어 다른 사람도 맛보게 양보하여라. 이것이 세상을 살아감에 지극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는 방법이다. 徑路窄處, 留一步與人行; 滋味濃的, 減三分讓人嗜, 此是涉世一極安樂法

뚜벅뚜벅 혼자 걸어가면 무슨 재미입니까? 더디오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어깨 부비며 걸어갈 일이 아니겠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혼자 다 먹어치우면 무슨 맛입니까? 사람들을 불러 함께 먹자고 해야 음식 맛이 더 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게 반편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게 사람 사는 맛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욕심을 3할쯤만 덜어내도 세상은 참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3할까지는 아니라 해도 이웃들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조금씩만 덜어놓고 살아도 삶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누가 갑자기 찾아올지 몰라 아랫목에 밥 한 그릇을 늘 준비해놓았던 옛 여인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게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 도와줄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워
윤수진 집사가 일하는 후암동의 중복장애아 보육원인 ‘가브리엘의 집’에는 벌써 2년째 한 달에 두 번씩 과자상자가 배달된다 합니다. 아이들의 이틀 주전부리 분량인데 기부자는 ‘익명’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기자가 어렵게 그 기부자를 찾았습니다. 그는 일흔을 앞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라에서 매달 생활비 37만원을 받는 기초생활보장 대상자였습니다. 혼자 사는 그는 5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한 달에 10만원 하는 사글세방에 살면서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무료급식으로 해결합니다. 나라에서 받는 37만원 가운데 아이들 과자값으로 12만원을 쓰고 방값을 내고 나면 15만원이 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것으로 한 달을 삽니다. 교회에 헌금도 합니다. 그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지는 해를 보면서 무척이나 배가 고팠어. 과자를 정말 먹고 싶었지. 쪽방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동네 탁아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 소리가 마치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 같았어. 너무 듣기 좋았지. 그리고 어린 시절 미치도록 먹고 싶었던 과자라도 그들에게 주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어났지.”(한겨레신문, 2007년 4월 20일 자 30면)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킨 것은 ‘주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이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존재로 자기를 일으켜 세울 때 뿐입니다. 기자에게 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도와줄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워!”였습니다. 도와줄 수 있어 기쁜 것을 넘어 고맙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는 제게 천둥처럼 들려온 소리가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사람을 살리는 양식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는 행복을 바로 연약한 사람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발걸음을 늦추어 연약한 이들을 기다려주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려고 마음을 쓸 때 우리는 천국의 여명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이 많습니다. 따뜻한 품을 잃어버린 채 속으로 분노를 키워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제 그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들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이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4월 22일 12시 23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