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7. 나는 신뢰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미4:1-5
설교일시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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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뢰한다
미4:1-5
(2007/4/29)

[그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

• 바로 너희 때문에
미가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와 거의 동시대 사람인 것 같은 데, 두 분이 서로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메시지가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꾸짖음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치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가 달랐던 것만큼 표현 방식이나 강도는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는 왕족의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을 이끌어가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루살렘의 정치상황과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가는 모레셋이라는 시골 마을 출신으로서 사회의 밑바닥 계층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지 뼈가 저리도록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향한 그의 언어는 신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때는 앗수르라고 하는 새로운 제국의 여명기였습니다. 745년에 등장한 디글랏빌레셀은 바벨론과 시리아를 정복할 채비를 갖추면서, 주변에 있는 약소 국가들을 삼키고, 도성들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이곳저곳으로 유배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스라엘 지도층들의 무능과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윤리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토라의 이상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부자들은 폭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짓눌린 백성들은 자책감없이 거짓말을 해댔습니다.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굽게 하는 지도자들의 죄를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2:1-2)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지도자라 하는 이들이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하여,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점을 뜯어냅니다.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은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합니다. 뇌물이 오가고, 돈벌이가 종교인들의 유일한 관심이 된 시대, 예언자의 음성이 사라진 시대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미가에게 주님의 영과 능력을 채워주시고 정의감과 함께 그들을 꾸짖을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3:12)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현실을 변혁시킬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이들을 거슬러서 선포해야 하는 참 예언자의 말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말입니다. 그들의 말은 늘 망치가 되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예언자는 지금 당신의 뜻을 저버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고 있습니다.

• 어이없는 꿈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Ira Dei) 속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역설적으로 그 백성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 성경을 대했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속좁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질투라니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실상은 텅 빈 것(一切皆空)이라고 가르치며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불교의 초연함에 비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질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실 수 있음을 제가 깨달은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기에 그들이 어긋난 길을 걸을 때면 화를 내십니다. 하지만 그 화는 늘 사랑에 잇대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질이 고약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구타하면서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미가는 폐허더미가 될 예루살렘,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성전 산이 새로운 희망의 뿌리가 되는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무너짐으로써 새롭게 세워지는 하나님의 꿈을 그는 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입니다.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몰려오면서 주님께 길을 여쭙기 위해 몰려올 곳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은 사정없이 깨뜨리지만, 상한 것은 싸매고 약한 것은 강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라와 나라 사이를 흐르고 또 흐르는 새로운 세상을 예언자는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 훈련을 하지 않을 세상, 예언자는 그런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상을 뒤덮는 때, 침략전쟁에 나선 군인들의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올 때 미가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 꿈은 살아내야 한다
참 어이없는 꿈입니다. 하지만 꿈조차 없다면 우리 영혼은 얼마나 가난할 것이며, 날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절망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저들이 꾸는 꿈의 뿌리입니다. 세계 도처에 있는 독재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성경읽기’를 금지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읽습니다. 우리의 꿈은 허망하지만, 하나님의 꿈은 허망하지 않습니다. 그 꿈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불의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의 꿈,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사는 세상의 꿈이 있어 우리는 행복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그 꿈을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거칠고 야비한 것들을 녹여 부드럽고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힌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한 그릇의 물도 함부로 엎지르지 않고, 한 삽의 흙이라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풀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등은 다 거룩한 생명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들을 어루만집니다.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 기울이자
(김준태, [인간은 거룩하다] 부분)

시인은 우리에게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고 권고합니다. 강 건너 마을 사람들, 곧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 그들과 만나러 가자는 겁니다. 그것이 이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내장된 칼과 창이 먼저 녹아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보듬어 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아슬아슬한 희망
지난 목요일 저는 군산에서 열린 제27회 삼남연회의 목사안수식에 다녀왔습니다. 장운 전도사의 안수를 보좌하기 위해서였는데, 잠시 차 한 잔을 나누는 가운데 그는 자기 교회의 형편을 들려주었습니다. 4년 전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교인이라고는 초등학생 2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울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수선화 한 뿌리를 옮겨 심으려고 호미를 가지고 흙을 깊이 팠습니다. 그런데 알뿌리가 어찌나 크고 깊게 박혀 있는지 호미로는 파낼 수가 없어서 삽으로 크게 흙을 떠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삽날에 찍힌 수선화 뿌리였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생명을 이어가는 수선화 한 뿌리는 신세 한탄만 하고 있던 그의 영혼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함께 앉아 있던 후배 목사 하나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 해 전 남해의 작은 교회에 부임했을 때, 그는 짐을 풀어놓고 먼저 교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교회는 먼지가 두껍게 쌓인 해 퇴락의 징후마저 보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전임자는 교인이 한 명도 없는 자기 교회를 떠나 이웃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던 것입니다. 먼지 쌓인 예배당에 엎드려 그는 많이 울었습니다. 어느 정도 주변을 정리하자, 교회 뒤편의 작은 둔덕에 있는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20cm 정도 되는 작은 나무였는데,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그곳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쌓였든 눈이 녹아내리면서 흙이 깎여서 뿌리가 다 드러난 채였습니다. 그에게 그 어린 소나무의 운명은 남의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밭으로 달려가 대나무를 베어내 그것으로 주위를 두르고는 흙을 돋워 뿌리를 묻어주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에 “아슬아슬한 희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 시대의 희망은 아슬아슬합니다. 늘 위태롭습니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눈물겹습니다.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갈등의 이면에 강대국들이 심어놓은 불신과 증오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희망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일어나 흙을 돋구어주고, 울타리를 만들어주면 희망의 뿌리가 깊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아슬아슬한 희망”이라 명명된 그 소나무가 제법 자라서 여름이면 그늘도 만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어느 철학자(Rene Descartes, 1590-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신뢰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신뢰하는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먼저 우리 마음에 깃든 날카로운 것들을 녹이고, 그 힘으로 폭력과 증오가 종식되는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모든 연약한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안으십시오. 이 마음이야말로 천국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섬기고 돌보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4월 29일 12시 17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