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9. 무지개 백성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7:20-23
설교일시 2007/05/13
오디오파일 s070513.mp3 [674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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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백성
요17:20-23
(2007/5/13)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관계 속의 존재
지난 주 오후 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누구나 다 깊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축제입니다. 우리의 축제 한 복판에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고, 감격에 잇댄 기쁨이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였습니다. 할머니들의 몸 찬양도 귀여웠고(?), 머리와 팔목에 커다란 꽃을 달고 나온 여선교회원들의 재치도 흥겨웠습니다. 젊은이들의 조화로운 찬양도 감격적이었고, 소주병을 들고 노래를 불렀던 남선교회원들의 넉살에 우리는 환호했습니다. 2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띠앗’, 혹은 ‘띠앗머리’라는 말을 아시지요? 형제 자매 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토박이말입니다. 내내 그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서로 지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입니다. 경쟁 구도 속에서의 부족함은 약점이지만, 사랑의 관계 속에서의 부족함은 그들을 더욱 굳게 결합시켜주는 계기입니다. 물론 성도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매개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즉 好惡의 감정을 넘어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전유물 같아서 사람들이 꺼리기는 하지만 合掌한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 손을 모은다는 것은 오른쪽과 왼쪽, 당신과 나, 인간과 신성을 합치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즉 생명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즉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합장이라는 말입니다.

분리되고 고립되며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1980, 문화인류학자)은 “손은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깊은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되신 교회는 이런 관계적 실존을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 됨의 중심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바치신 기도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주님은먼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제자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5).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굳은 결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또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 거룩한 삶이란 진리 안에서의 삶입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니까,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연약한 이들과 신음하는 피조세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빼놓고는 거룩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21) 주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협상도 아닙니다. 주님은 오직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자기를 비웠습니다. 이것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초월입니다. 시냇물은 강물에 흘러들어감으로써 더 큰 몸을 얻습니다. 강물은 바다에 흘러들어감으로써 더 큰 몸을 얻습니다. 이것을 초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살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생명이 됩니다.

내 뜻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려 할 때 관계는 어그러지게 마련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내 생각, 내 입장, 내 경험, 내 욕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물 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져버린 베드로를 두고 싱거운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는 왜 빠졌을까? 물보다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무게는 자아의 무게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무거워졌고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가끔 격한 감정의 바다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마음이 앞설 때입니다. 진정한 일치는 무거워지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무거워지지 않으려면 상대가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버리고 그를 돌보고 섬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일치 속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좁장한 ‘자아’를 버리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수록 우리는 그런 일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
이런 일치를 온 몸으로 살아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광’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22a) ‘영광’은 문자 그대로 ‘빛나는 광채’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님의 영광이라는 게 좀 수상합니다. ‘내게 주실 영광’이라고 하셨다면 부활의 영광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주신 영광’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주님의 33년의 생은 그다지 영광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한 변방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저 근근히 먹고 살다가, 복음을 전파하느라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따르는 이들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늘 힘있는 자들의 질시어린 눈초리를 견디어내야 했고,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다소 뜬금없어 보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1)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4)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5)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이란 세상 사람들 앞에 ‘짠~’ 하고 드러나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겨주신 일을 완성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광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영광은 수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입니까? 먼 데 볼 것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명을 북돋고, 돌보고 살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하지 말고, 오늘 무슨 좋은 일을 할까 소망을 품고 살면 됩니다. 소박하나마 그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 공동체의 존재 이유
우리가 깊은 일치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까닭을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일차적으로 증언의 매체는 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이루어내는 깊은 일치와 사랑의 분위기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의 결핍(lack of trust)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일에 너무 골똘한 나머지 우리가 더 큰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임을 잊고 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어떤 이는 현대인의 기본적인 정서를 ‘Heimatlosigkeit', 즉 고향상실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모두가 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난민이 되어 살아갑니다. ‘나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야말로 이 시대의 우울증의 뿌리입니다. 이런 느낌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장애인 올림픽에 나갔던 앤드류(Andrew)는 100m 경기에서 꼭 우승하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결선에 올라갔는데 옆 레인에서 달리던 선수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앤드류는 다가가 그를 일으켰고 둘은 손을 잡고 결승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금메달보다 더 값진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의 깊은 일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기다려주고, 손 잡아주고, 일으켜주고, 함께 걸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 노인과 아이들…. 교회가 아니었더라면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한 데 불러주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와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들의 삶에 연루되어가면서 더욱 더 큰 존재로 성장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가 한번은 자기 교회 회중들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손을 들어보십시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손을 들었습니다. “이제 손을 흔들어 보십시오.” 높이 들린 그들의 손을 반짝이는 별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감격스레 바라보던 투투 주교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손을 보십시오. 저마다 색깔이 다릅니다. 우리는 무지개 백성입니다.” 무지개는 다양한 색깔의 조화를 통해 우리를 유년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떠올립니다.

교우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무지개 교회라고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무지개 백성이라고 믿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를 이루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깊은 이해와 일치와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일치의 정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불의를 타파하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고, 세상의 연약함을 감싸안는 사랑의 품이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향해 함께 전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5월 13일 12시 22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