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1. 비상과 일상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민11:24-30
설교일시 2007/05/27
오디오파일 s070527.mp3 [682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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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과 일상
민11:24-30
(2007/5/27, 성령강림주일)

[모세가 나가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백성의 장로들 가운데서 일흔 명을 불러모아, 그들을 장막에 둘러세웠다.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에 휩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더불어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린 영을 장로들 일흔 명에게 내리셨다. 그 영이 그들 위에 내려와 머물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들은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남자가 진 안에 남아 있었다. 하나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들은 명단에 올라 있던 이들이지만, 장막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영이 그들 위로 내려와 머물자, 그들도 진에서 예언하였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서 예언하였다고 알렸다. 그러자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곁에서 모셔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서서,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함께 진으로 돌아왔다.]

• 비전과 현실 사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이 잘 안 되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없다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을 겁니다. 소자본을 가지고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은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상품 아이템을 결정하고, 가게를 얻고, 인테리어를 할 때 사람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그 일을 감당합니다. 몇 날 며칠 밤잠을 안 자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그에게는 꿈이라는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시작되고, 생각한 것보다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느낌이 들면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 불안감은 절망감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 지극한 어둠을 어떻게 맞이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느냐가 사업 성공의 관건입니다. 돈이라도 많다면 버텨볼 수라도 있지만, 있는 돈 없는 돈 톡 털어넣고 시작한 일이 처음부터 삐걱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바짝바짝 타오를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도 아슬아슬해집니다.

애굽을 탈출해 나와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의 형편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시내산을 떠난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은 벌써 지쳤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비전은 현실적인 불편 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이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민11:4b-6)

이런 불평을 터뜨리는 이들은 대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꿈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즉자적(卽自的, an sich) 대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의 필요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들은 히브리인들 사이에 일고 있던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주체적으로 내면화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어이 새로운 세상을 열리라는 다부진 결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구되는 희생 앞에서 그들은 뒤로 물러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역사에 대한 비전은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에 대한 그리움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은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셈하여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4:28). 일시적 흥분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정을 포함하지만, 감정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 탈진한 모세
불평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백성들은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이제는 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보며 노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울음과 하나님의 노하심 사이에서 모세는 기력이 다 빠지고 말았습니다. 홍수에 논둑 터지는 것처럼 이곳을 막으면 저곳이 터지고, 저곳을 막으면 이곳이 터집니다. 모세는 이제 더 버틸 기운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민11:11b-12a)
․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민11:14-15)

우리는 출애굽기의 모세를 기억합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마치 아피스 신을 숭배하는 애굽사람들처럼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모세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화가 났지만 곧 정신을 수습한 후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출32:32). 배수의 진을 친 격입니다. 출애굽기는 그를 절망을 모르는 위대한 영혼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우뚝 일어선 지도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수기의 모세는 거듭되는 백성들의 투덜거림 앞에서 거의 탈진한 모습입니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다지도 당신의 종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시는 것일까요?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16세기 카르멜 수도회의 위대한 개혁자입니다. 그녀가 어느날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다가 말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물속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이 내가 내 친구들을 다루는 방식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테레사는 ‘당신께 친구가 별로 없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군요’라고 응수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테레사와 하나님은 마치 흉허물없는 친구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이 아니면 이럴 수 없을 겁니다. 또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내 친구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위로는 못해줄망정 너무 매정한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당신의 종들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장로들을 구별해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백성 돌보는 짐을 그들에게 나누어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사람들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한 후에 백성의 장로들 가운데서 일흔 명을 불러모아 그들을 장막(帳幕)에 둘러세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휩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더불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린 영을 장로들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 영이 그들 위에 내려와 머물자, 그들은 예언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앞날에 대한 예견이라기보다는 그들의 하나님 현존 체험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일종의 입신 상태를 경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일상을 꿰뚫는 비상한 경험입니다. 무당들이 작두를 타는 모습을 보셨는지요? 달구어진 석탄 위를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셨는지요? 그들은 일상의 문턱을 넘어섰기에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무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무아경의 체험은 황홀함을 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황홀함에 지속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그런 체험 속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곧 일상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체험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은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릅니다. 감정이입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것을 말합니다. 연속극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체험은 일종의 공감 혹은 연민(sympathy)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그의 삶을 향해 나를 열어놓는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고전2:11) 영에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자기를 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들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게 합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성령은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만드십니다.

일흔 명의 장로들은 비상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남자가 진에 남아 있었습니다.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인데, 어쩌면 형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모세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장막으로 나오라는 명을 따르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렸고, 그들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하나님은 자유롭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여호수아가 나서서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진언합니다. 모세의 영적인 권위를 세우고 싶은 충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정치적 권위로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영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이 말이 참 좋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감화되어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조율된 사람들이 되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모세의 꿈이 실현되는 때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욜2:28-29)

• 일상 속에서 거룩을 살아내기
참 꿈같은 일입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분쟁도 불평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민수기 12장부터 16장까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이들이 백성들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불복종과 불평과 회의와 불신과 반역으로 분열됩니다. 이게 인간세계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장로들이 경험한 비상한 하나님 체험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 희게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황홀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세상 염려 근심이 없는 순수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 베드로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산 아래 마을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조각난 삶을 거룩하게 변형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쳤고, 목이 마릅니다. 어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듣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7:37b-38)

요한은 이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수정된 이들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사막 같은 이 세상의 오아시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당신이 거하실 처소로 택하셨습니다. 날마다 누추할망정 우리 마음에, 집에, 직장에 그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때 우리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곁에 다가와 시원한 샘물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로서는 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성령의 불꽃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생수처럼 솟구쳐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5월 27일 12시 32분 1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