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5. 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5:43-48
설교일시 200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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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
마태5:43-48
(2007/6/24)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 비폭력적 저항
10여 일 전 눈빛이 맑은 젊은이들 몇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매우 분주한 날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려는 그 열정을 내칠 수가 없어서 예정 시간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날의 만남을 닫아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대학을 졸업한 후 전국 노점상 연합회에서 일을 한다는 한 젊은이가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나는 쉽게 대답했습니다. “‘평화란 이것이다’ 할 때, ‘이것’에 해당하는 것들은 참 많지요. 전쟁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고, 억눌림이 없고,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함이 없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평화의 시작은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고 그를 위해 밥을 덜어내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는 말이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습니다.

내일이면 한국전쟁이 벌어진 지 57년이 되는 날입니다. 분단의 세월은 이미 회갑을 넘겼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평화의 길은 요원합니다. 핵무기의 철폐를 둘러싼 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개성공단을 비롯해서 남북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고, 문화인들의 교류가 활발한 것도 좋은 징조입니다. 비료를 공급하고,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일일 겁니다. 이 일은 어쩌면 분단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존재가 출현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들만이 그 길의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평화주의자(pacifist)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골호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헤롯 안티파스의 위협이 가중될 때 그를 ‘그 여우’라고 부르셨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 마당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위선을 꾸짖으실 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분노와 꾸짖음의 바탕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에 눈을 감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의 가면을 벗기시지만, 폭력적인 대응은 삼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원수를 ‘좋아하라’(like)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라’(love) 하신 것이 참 다행입니다. 좋고 싫음은 거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의지적인 노력을 포함합니다. 섣불리 사랑하려고 하다가는 스스로 상처입기 쉽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주하는 기도를 하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품부된 역할을 감당하며 삽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나 느부갓네살이나 빌라도는 다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이 비인간의 자리로 추락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힘과 폭력을 가지고 다른 이를 억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됩니다.

•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뿐입니다. 성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긍휼’(compassion)입니다.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com’과 ‘고통 받는다’는 뜻의 ‘passi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만들어 놓고 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으십니다. 히브리어로 긍휼(rahum)을 뜻하는 단어는 ‘자궁’(rehem)을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자궁은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감정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아이를 둘로 갈라 두 여인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진짜 엄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왕상3:26) 아이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저 여자에게 넘겨주라고 말합니다. 이때 ‘모정이 불타올라’로 번역된 구절은 사실은 ‘그녀의 자궁이 꿈틀하여’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이 꿈에도 그리던 친동생 베냐민을 보자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누르지 못하여, 급히 울 곳을 찾았다”(창43:30)고 합니다. 여기서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도 역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렘31:20)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이 떨립니다(God's womb trembles).
그렇기에 하나님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사회적 표현은 정의입니다. 토라와 예언서를 꿰뚫고 있는 것은 불의에 대한 고발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곧 이어 ‘일용할 양식’과 ‘빚에 대한 탕감’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밥’과 ‘빚’의 문제야말로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여러 해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회사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빚에 몰려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대부업체의 돈을 빌렸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이런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부자 나라를 향해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 세계의 분열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그런 문제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는 그 강도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체제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회 체제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입니다.

우리는 자본에 종속된 많은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사들은 정말 그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은 꿩 잡는 게 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스스로 부자가 된 교회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당을 짓고, 많은 땅을 사서 기도원을 짓고, 묘지를 조성하고, 큰 차를 타고 다니고, 기득권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gelists)들의 80%가 이라크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전쟁은 가장 큰 사치요 낭비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비가 들어가는 전쟁을 기독교인들이 정당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비지성적이고 문자주의적이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이건 경고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열정을 닮지 않는 기독교인이란 세모꼴 동그라미라는 말처럼 어불성설입니다.

• 새로운 존재의 요청
기독교인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갈5:24)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모든 인간은 대포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을 불어넣으셔서 언제든 자극이 주어지면 크게 폭발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불발탄으로 끝납니다. 뇌관에 물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뇌관과 화약을 보호하는 것이 도덕성인데, 세상에 살면서 양심이 흐려지면 하나님이 탁 치셔도 폭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도 화낼 줄 모르고,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나서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불발탄입니다.

하나님이 탁 쳐도 폭발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타락한 실존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이라크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후로 밤이면 맥박이 120에 이르고, 열이 40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세상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꼈던 것입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가난한 한 작가가 온몸으로 아파하는 그 시간, 미국의 증권가인 월 스트리트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전쟁 특수로 군수산업체의 주가가 급등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악마화된 문명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고통받는 이가 있는 곳에서는 축배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분쟁중입니다.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어코 택해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미움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선언하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새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반경환, <때 1> 전문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굽힐 때 굽히고, 솟구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날 줄 알아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피조세계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의 정의로 세상의 불의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청하는 사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닮아가려고 늘 깨어 있는 사람, 이런 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길을 확고한 믿음으로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6월 24일 12시 52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