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6. 차별 없는 세상
설교자 김기석
본문 갈3:23-29
설교일시 2007/07/01
오디오파일 s070701.mp3 [6759 KBytes]
목록

차별 없는 세상
갈3:23-29
(2007/7/1)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 파이다고고스
율법에 관련된 말씀을 읽을 때면 장난이 지나쳐 전체 기합을 받곤 했던 초등학교 때가 생각납니다. 한참 훈시를 하던 선생님은 가끔 무슨 급한 볼 일이 있는지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 끝에 이르기도 전에 개구쟁이들은 눈을 뜨고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장난질을 시작합니다. 순종적인 아이였던 나는 누가 무슨 장난을 하든 선생님의 명령대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면 눈을 뜰까 하는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내 인내하는 나 자신의 성실함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끝까지 버텼습니다. 교실로 돌아온 선생님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던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시면, 나는 겨우 서너 명의 모범생들과 함께 점잖게 손을 들곤 했습니다. 물론 거짓으로 손을 드는 장난꾸러기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선생님의 권위를 내면화한 애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답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떠나서 살아야 했던 내 모습이 그랬습니다. 나는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늘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율법의 규정에 묶여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을 ‘개인교사’(몽학선생, paidagogos)라고 말합니다. ‘paidagogos’는 고대 그리스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家僕)’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족 자제들을 돌보고, 지키고, 학교에 데려가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경험과 능력에 있어서 능히 교사가 될만한 이들이지만,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책임을 맡지는 않았습니다.

‘몽학선생’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가 여전히 미숙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미숙한 아이에게는 훈련과 규율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하면 꾸중을 듣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사회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한 과정은 아닙니다. 금지 명령 앞에 설 때마다 위반에의 욕구는 점점 높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 실제로는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처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 유대교에 대한 오해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부담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카포렛)에는 그룹(cherub)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룹은 에덴 이후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파수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그룹의 날개 사이에 임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약궤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생명의 나무라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율법과 믿음을 대조시킨 바울의 가르침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원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말이 없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데 인간은 어찌해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처럼 우리를 절망시키는 말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유난히 원죄를 강조해왔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천여 년 동안 사용한 대중 언어인 이디쉬어에는 ‘원죄’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속속들이 썩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낯설고도 불쾌한 사고입니다. 그들도 사람에게 악에 끌리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인간 속에는 악에 맞서는 선한 충동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까닭은 악의 경향성에 맞서는 선한 충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심판관인가, 아버지인가?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에 집착하면서, 율법을 외적인 규정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의인과 죄인을 가르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갈랐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작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긍휼하신 하나님, 사람들에게 방황의 여지를 열어두시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법조문을 들고 사람들을 심판하는 하나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삶은 축제가 아니라 살얼음판이 되었습니다. 특히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은 부정적인 정체감을 가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긍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율법은 더 이상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얽어매는 굴레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질곡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자구를 어떻게 지키느냐보다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더욱 근본적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각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섭고 냉정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아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붓자식처럼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어려운 이들을 열심히 도우면서도 내적인 평화와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 규정을 잘 지키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임이 분명하다면 이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두운 밤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다하면 새벽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뇌의 순간이 찾아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히려 찬양의 기회로 삼습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의 허물과 연약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의 책을 읽다가 가슴 뭉클한 대목과 만났습니다. 93세 된 아버지와 64세가 된 아들이 함께 여행을 하면서 서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연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친밀감은 30년 전만 해도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다소 권위적이었고 무뚝뚝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다가서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나이가 들고 점점 방어적인 태도가 줄어들면서 둘은 서로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면서 “내가 아버지를 바꾸려는 마음을 버릴수록 아버지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시며 자신의 약한 부분을 내보이신다. 이제 둘 다 ‘노인’이 되다 보니 우리의 필요는 거의 비슷해졌다.”(헨리 나우웬, <<안식의 여정>>, 132-133쪽)고 고백합니다.

서로를 바꾸려는 태도를 버리고, 서로의 약한 부분을 내보이게 되기까지 그들에게는 3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질곡 아래 있는 이들은 자신의 허물과 약함을 한사코 숨기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려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은혜 아래 사는 이들은 자신의 약함과 허물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통로임을 알기에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어 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과 경쟁심은 줄어들고, 상대의 아픔을 나누려는 사랑은 커집니다.

• 차별 세상을 넘어
율법주의의 특색이 ‘가름’이라면 은혜의 특색은 ‘얼싸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받아 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저마다 부족함과 허물이 많지만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받아들여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 삶은 황량하게 변합니다. 세계적인 락 그룹 비틀즈Beatles의 드럼 연주자인 링고스타가 한번은 병이 들어 다른 사람에게 드럼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안했습니다. 팀 멤버들이 다시 자기를 반겨줄지 회의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밴드의 일원이 될만큼 실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동료들에게 이적 의사를 밝혔습니다. 동료들은 자기들이 링고스타를 깊이 사랑하며 존중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최고의 드럼 주자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의 온 집을 꽃으로 가득 채워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친밀하게 사귀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선들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귑니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피부색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낯선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의 지평을 확장하라는 하늘의 초대입니다.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열고, 대문을 열 때 새로운 인류가 탄생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열린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28)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이 ‘있어라’ 하는 자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삶은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차별을 지우며 사십시오. 차별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사람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부둥켜안으십시오. 한미 FTA를 통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의 살 권리를 확보해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새터민과 이주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벗이 되어주십시오. 이것을 빼놓고는 ‘거룩한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차별이 사라진 참 평화의 세상이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7월 01일 12시 46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