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7. 물처럼, 바람처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9:51-56
설교일시 2007/07/08
오디오파일 s070708.mp3 [667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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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바람처럼
눅9:51-56
(2007/7/8)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새로운 엑소더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이 말은 마치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의 홀가분한 기분을 나타내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곧 죽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그래서’라는 접속 부사입니다. 이 단어는 하늘에 올라가실 날과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인과관계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스러운 땅이기 때문에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의 피가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세계의 배꼽(navel of the world)이라 불리우는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은 사실상 종교적 광기와 폭력의 현장임을 주님은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이야말로 당신의 죽음의 자리가 될 것임을 짐작하고 계셨습니다. 모두가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 속에 깃든 위선과 탐욕을 보는 사람, 모두가 지도자들의 권위에 짓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때 홀로 일어나 그들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사람, 가난과 짓눌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사람…어느 시대이든 그런 이들은 불온의 낙인이 찍히게 마련입니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비인간’으로 강등되고, 따라서 그는 죽여도 괜찮은 사람이 됩니다.

‘죽여도 괜찮은 사람’ 예수가 호랑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것은 비상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겪으셨던 내적인 갈등의 깊이를 짐작케 합니다. 그 길을 피하고 싶은 생각이 왜 안 들었겠습니까? 아직도 해야 할 일은 태산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십자가보다는 영광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고대하는 이들의 퀭한 눈길을 외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곳에 올라가 신앙이란 예속이 아니라 해방임을, 지배가 아니라 섬김임을, 가르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감싸 안는 사랑임을 몸으로 증언해야 했던 것입니다. 죽음의 길이라 해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 本과 末의 뒤집힘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로 중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도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고 싶은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찾아온 이 진귀한 손님을 잘 모시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기들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에서 함께 예배드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들의 경쟁자로 인식한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한 데 비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믿음의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갈등은 뿌리 깊은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한 여인의 대화가 길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알아맞히는 예수님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물론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틀고 싶은 여인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지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을 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여인조차 신앙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20-24) 신앙의 정통성이란 장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이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느냐고 관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것을 그리심산 예배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당연시 되고 있던 환대의 윤리를 저버린 채 예수 일행을 마을로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원수가 되어 살아갑니다. 신앙의 근본은 놓치고 지엽말단의 문제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보고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마23:23)고 책망하셨습니다. 本과 末이 뒤집힌 것입니다. 목요일에 우리는 웨슬리 목사의 설교를 함께 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사랑에 대하여>라는 설교의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는 깊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모든 자녀와 친구, 또는 원수, 기독교인, 유대인, 이교도, 또는 불신자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없는 믿음, 만인에 대한 친절함이 없는 믿음, 만사에 포기가 없는 믿음, 어떠한 상황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믿음-이러한 믿음은 현재, 과거, 미래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와 생각과 생활방식이 다르고 심지어는 고백하는 신앙이 다른 사람조차 사랑할수 없는 믿음은 아예 믿음일 수 없다는 웨슬리의 말은 편협한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 마음에 타오르는 두 가지 불
제자들은 사마리아 마을의 냉대에 당황했습니다. 그들의 심중에는 ‘이분이 누구신데 너희들이…’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거부가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도 또한 나를 받아들일 때 우정이 싹틉니다.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배척받을 때 우리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남습니다. 그 상처는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적대감정으로 바뀝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이건 좀 과도한 반응인 듯싶습니다. 보아너게라는 별명이 그저 붙은 별명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잡기 위해 보낸 별동대를 하늘의 불이 태웠다는 열왕기하 1장의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의 이 말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보이자는 권고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요 사랑의 사도이신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치고는 너무 폭력적입니다. 화의 불꽃은 우리 존재 전체를 살라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

우리 속에는 다른 불꽃이 있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자카리아 모함마드는 어느 날 토마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보았습니다. 검은 새였습니다. 조금 가까이 보려고 일어나서 다가가자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습니다. 그때 그는 새의 날개 밑에 있는 불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건 붉은 깃털일 겁니다. 그는 친구인 앙지에게 말했습니다. “새가 자신을 불태우려 해요, 앙지. 자기 자신을 불태운다구요.” 앙지가 그의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날개 밑에 자기만의 타오르는 불꽃을 갖고 있지요.” 자카리아는 나중에 시를 한편 썼습니다.

모든 이의 날개 밑에는 숨겨진 불꽃이 있다네
그 불꽃은 잘 간수해야 하지
불꽃이 번져 자신을 태워버리지 않도록
또는 그 불꽃이 꺼져 자신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그것은 은밀한 불꽃
남이 그 불꽃을 알아챌 때는
오직 당신이 날려고 날개를 퍼덕일 때뿐

우리 속에서 은밀히 타오르고 있는 불꽃, 우리를 태워버리지도 않으면서도 우리를 밝혀주는 그 불꽃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만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불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를 모욕하고, 피해를 주고, 배척한다 해도 분노의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미움이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거든 얼굴에 미소를 짓고 마음에 온유함과 사랑을 달라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미움의 불꽃은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불꽃을 꺼뜨립니다.

• 스승의 꾸짖음
주님은 분노에 사로잡힌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다독이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심정을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길로 삼은 이들은 불의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피해야 합니다. 폭력은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에 비틀즈 팬들은 ‘평화에게 기회를’(give peace a chance)를 수없이 외쳤습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과 적의가 몰려올 때 평화에게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우리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색을 하고 꾸짖어주시는 스승이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 스승이 계셨기에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한 그 미움이 우리의 삶을 조종합니다. 하지만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분노와 당혹감으로 우리 시선이 좁아질 때 우리가 평화의 전사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기도 중에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무질서에 맞서 일종의 반격을 시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들을 냉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거절에 상처를 입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아홉 개의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지금 우리 마음 앞에 이르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 문 앞에 이르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3:20)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영혼의 스승을 모신 사람은 이미 평화의 일꾼입니다.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면서 만나는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하는 물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이제 주님과 더불어 자유의 새 땅을 향해 길을 떠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7월 08일 12시 35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