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8. 그는 바로 내 마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몬1:4-14
설교일시 2007/07/15
오디오파일 s070715.mp3 [776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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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내 마음
몬1:4-14
(2007/7/15)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주 예수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그대의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을 그대가 깨달아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 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 오늘을 사는 사람
몇 해 전 로마에 갔을 때 “Tre Fontane”(Three Fountains) 성당으로 알려진 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서 매우 한적했습니다. 그 성당의 입구에는 성 베네딕트의 동상이 서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 성인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生命水路(Ad Aquas Salvias)라고 불리우는 길을 따라 마당을 지나면 “Tre Fontane”에 이르게 됩니다. 안내인을 통해 그곳이 바울 사도가 참수당한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숙연해졌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참수된 바울의 머리는 세 번 바닥에서 튀어올랐다고 하는데, 그 후에 그의 머리가 닿았던 곳에서 샘물이 솟아 올랐다고 합니다. 과연 예배당 한쪽 벽면에는 세 개의 샘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있다”는 초대 교회의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 155-230)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달려온 고단한 인생의 종착역이 순교라는 사실에서 비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가 옥중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그것이 가이사랴인지 로마인지 에베소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염려하기보다는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제자인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회에 거짓 교사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단순한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골로새 교회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개인 서신을 함께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받아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주인에게 상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것 같습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주인집을 벗어나 먼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중재를 바라면서 바울을 자발적으로 찾아간 것인지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바울과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초라한 죄수에게서 오네시모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며칠 전 교우 몇분이 차 한 잔을 달라며 제 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고 한 분이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뭔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간단하게 설명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영광이란 말에는 이미 ‘빛’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세상에 숨겨진 하늘의 빛을 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아닐까요?” 물론 이 말은 충분한 설명이 못됩니다. 하지만 방향은 맞습니다. 오네시모는 옥에 갇혀서도 한 없이 자유롭고, 정 깊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바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존재의 울림말을 통해 말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10)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가장 힘겨운 상황에서도 바울은 생명을 출산하고 있습니다. 이게 생명의 복음에 사로잡혀 오늘을 영원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 생기를 주는 사람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바울 사도도 다른 이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레몬서를 볼 때마다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4) 이것은 빈 말이 아닐 겁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고 편지를 쓰고 기도하는 것 말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주님과 교통하는 그 시간, 시간과 거리는 소멸되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영적인 친교는 바울의 가슴에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천리라면 천리라도 지척이요/마음이 천리오면 지척도 천리로다/우리는 各在千里오나/지척인가 하노라”(<청구영언>에 나오는 무명씨의 시). 지척에 살면서도 마음이 천리인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바울과 빌레몬의 영적인 교제가 참 아름답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이 믿음과 성도 사랑에 있어서 다른 이의 본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꺼워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의 그러한 삶이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요 위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가 제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대목과 만났습니다. 개역성경이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라고 번역한 7절을 표준새번역은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이 원뜻에 가깝습니다. 빌레몬은 성도들의 가슴에 새 마음을 심어주는 사람입니다(you have put new heart into the saints, JB).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성도는 다른 이들의 지친 마음에 생기를 가져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빌레몬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고, 신앙과 삶으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는 제게 키르기스스탄에 가 계신 김성한 장로님과 조영순 권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진 존재였던 고려인들은 두 분을 통해 삶의 맛을 되찾았습니다. 토요일마다 장로님의 집은 가정 교회로 변합니다. 많은 고려인들이 찾아와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음식을 나눕니다. 너무 많이 찾아와 이제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 불고 있는 생기는 바로 성령의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80 줄에 접어든 노인들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이 이전보다 더 관대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다 깨달아, 마침내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보다 좋은 기도의 후원은 없을 겁니다.

• 명령이 아니라 간청을
바울은 빌레몬에게 한 가지를 당부합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애를 가지고 맞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노여움을 풀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달아났던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빌레몬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 마음에 분노의 감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정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 문제를 잘 풀어내는 것은 빌레몬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신앙적 도전임을 바울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일고 있는 분노와 미움을 씻어내고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기까지 빌레몬은 내홍(內訌)을 겪어야 했을 겁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 뿐입니다. 또한 좋은 지도자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발걸음이 더딘 사람을 기다려주면서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생각보다 발걸음이 더디다고 그를 윽박지르거나 등을 거칠게 밀어댄다면 그는 이내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브니엘에서 이루어진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기억합니다. 서로 원수처럼 헤어졌던 형제가 마침내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 재회하는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형제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후 에서는 야곱에게 자기가 길 안내를 할 테니 서두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형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창33:13-14)

너무 자기 확신에 차서 사람들을 몰아대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탈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를 주시고,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실 뿐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 공동체 세우기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가 얼마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달아났을 때의 오네시모는 쓸모 없는(achrĕston)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쓸모 있는(euchrĕston)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쓸모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자본주의 세상의 논리를 닮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비정규직법이 7월부터 시행되면서 도처에서 쟁의와 농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기업으로 이름 높은 이랜드도 이런 분쟁의 현장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경쟁과 효율을 숭상하는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사용주들은 쓸모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대합니다. 결국 이런 태도는 비인간화된 사회를 낳게 됩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바울이 ‘쓸모’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바울의 인간관이 천박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오네시모(Onĕsimos)라는 이름의 뜻은 ‘무익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름을 갖고 싶겠습니까? 어떤 신앙인이 자기 이름을 이렇게 바꾸었다면 우리는 그의 겸손한 인간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힘있는 자들에 의해 부과되었다면 그 이름은 한 존재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내막을 알 길은 없지만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님 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으로 말장난(word play)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에 대한 애정은 “그는 내 마음”이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납니다. 개역 성경은 “저는 내 심복”이라고 옮겨놓았는데, 심복하면 어쩐지 굴종이 떠올라 싫습니다. ‘그는 내 마음’, 이건 참 대단한 칭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에게 손해나 끼치던 사람이 이제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를 자기 곁에 잡아두려 하지 않습니다. 풀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바울의 간곡한 당부의 편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오네시모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만남은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을 겁니다. 신앙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지요? 이 만남이 용서와 화해로 이어진다면 이 과정을 통해 빌레몬도 오네시모도 영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가 얻는 유익입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용서와 화해의 모습은 하나님의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 앞에 증거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오는 종과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에서 그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본보기 집(model house)이 되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는 교회는, 성도들 간의 용서와 희생과 돌봄을 통해 든든히 세워집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사람 빌레몬, 그리고 주님 안에서 변화되어 돌봄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오네시모, 그리고 죽어서도 시원한 샘물을 남겨주는 바울과 같은 인격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7월 15일 12시 41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