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9. 어둠 속의 빛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58:6-12
설교일시 2007/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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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빛
사58:6-12
(2007/7/22)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은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다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 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

• 오도된 경건
올해 초에 감리교 몸비우기 수련회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밥을 굶고 가야 격에 맞았지만, 저는 동행인을 고려하여 밥을 먹고 갔습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실직고하고는 함께 웃었습니다. 밥을 굶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배고픔을 뼈저리게 체험해본 사람들의 경우는 더합니다. 오죽하면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가 있겠습니까?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을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들은 철저하게 그 계율을 지킵니다. 기독교인들도 사순절에는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분들이 그 금식을 통해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냐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아가 팽창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는 금식을 은혜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열거했습니다. 금식 혹은 단식은 제도적 폭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항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Yom Kippur)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날은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로부터 열흘 째 되는 날이었는데, 하나님께 지은 죄는 물론이고 이웃들과 불화하거나 갈등을 빚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용서를 구하는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해가 지기 전에 콜 니드레(Kol Nidre, 모든 서약들)라는 전통적인 노래를 부르며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사람들은 금식을 하며 자기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드러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중에 몇 가지의 금식일을 더 제정했습니다. 그것은 각각 바벨론의 1차 침공일, 예루살렘이 파괴된 날, 성전이 파괴된 날, 아히감의 아들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날 등인데, 모두가 나라의 패망을 아프게 기억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날을 기억하자는 뜻은 하나님을 거역한 삶이 얼마나 쓰라린 결과를 낳는지를 자각하자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금식의 참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만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금식일에 향락을 즐기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키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기는 하지만 이웃과의 다툼과 싸움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면 그게 무슨 금식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눈에 비친 금식의 실상이었습니다. 본과 말이 뒤집힌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도 종교의 본질은 외적인 규례의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으로의 회복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이 없는 금식이나 구제나 기도는 오히려 교만의 독을 우리 마음에 풀어놓기 일쑤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는 헤아릴 줄 모르면서 헌금을 많이 바친다고 그게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해도 지금 당장 돌보아야 할 이들을 외면한다면 그의 경건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 사회적 유대의 회복
이사야는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세상에 의를 세우는 일이 곧 참된 경건이요 금식입니다. 이사야는 관료들에 의한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된 현실 속에서 권력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하는 대중 편에 서라고 말합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을 빼놓고는 경건한 삶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1)고 하셨습니다. 이 위험스런 초대에 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참 선명합니다. 빈 배를 부여잡고 잠을 청하는 이웃들이 옆에 있는 데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으면서 하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도 진정한 경건행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와 음식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금식입니다. 세상에서 따돌림받는 사람들을 맞아들여 그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 헐벗은 사람은 입히고, 가난한 일가 친척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건입니다. 이사야는 사회적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요 금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추수 때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위해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은 밭이 없으니 그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에게나 인생의 밭은 있습니다. 물질, 마음, 시간 등 내 삶의 한 모퉁이 쯤은 이웃들의 몫으로 덜어놓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신 권정생 선생은 어린 시절에 거지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핵환자였던 그의 존재는 딸을 출가시켜야 했던 아버지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권정생에게 누이를 시집보낼 동안 잠시 밖에 나가 살다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일대를 떠돌면서 유랑걸식을 하게 됩니다. 그때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뀩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집 아주머니, 가로수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다 물을 길러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 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 배 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너 주시던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엔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얼어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220쪽)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어도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늘이 주신 본딧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 바로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배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 신바람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비록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해도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이미 빛이 되어 우리를 환히 밝혀주니 말입니다. 그 빛은 세상의 어떤 빛보다도 부드럽고 포근하고 밝습니다. 우리 속에 빛이 있으면 세상은 밝아보이고, 우리 속에 어둠이 차있으면 세상도 어둡게 마련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의 <신바람>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선생이 잘 다니는 골목길에 어느날 분식집이 새로 생겼습니다. 무심히 보아 넘길수도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스름녘, 시인은 형광등 불빛 아래 재게 움직이는 분식집 아줌마의 모습을 창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참 좋아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런 정황을 묘사한 후에 시를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오, 새로 시작한 일의 저 신바람이여
세상에서 제일 환한 그 부분이여
옆집 담 안에 마악 벙그는 목련들도
신바람의 그 아줌마를 하늘로 하늘로
다만 받쳐올리고 있구나, 다만!
(<신바람> 부분)

신바람보다 더 환한 것은 없습니다. 벙그는 목련들도 신바람의 아줌마를 하늘로 받쳐올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가는 곳마다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 생은 절망일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밤도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의 생은 마치 ‘물 댄 동산’과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만사형통할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강의 길로도 인도하시지만 때로는 고통의 가시밭길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실패와 두려움을 모르는 초인이 아니라, 실패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그 영혼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위탁하셨습니다. 이 절대적 신뢰야말로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의 근원입니다.

• 새 이름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근거해서 사회적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두고 세상은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기에 기왕이면 잘 살아야 하는 데, 잘 산다는 게 뭐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는 일이 아닐가요?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 중에는 무너진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냉랭한 세상살이에 지쳐 움푹 파인 영혼들이 온전함을 회복하도록 돌보아 주는 것이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시골에서 상여가 나가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상여머리를 잡은 선소리꾼이 꽃으로 치장된 상여 위에서 방울종을 흔들며 노래를 매깁니다. 그러면 상두꾼들이 그 소리를 받아 후렴을 부릅니다. 이 노래를 <향두가>라 하는 데, 향두가는 장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됩니다. 노래는 정든 이들을 두고 떠나는 아쉬움으로부터 부모의 은공을 다 갚지 못한 후회, 남은 자들에 대한 부탁, 고독한 여행길에 대한 탄식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는 저승에서 있을 심판에 대한 노래로 끝이 납니다. 그 노래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인간 세상 태어나서 무슨 선심하였는가
배고픈 이 밥을 주고 지성공덕하였는가
헐벗은 이 옷을 주고 불안공덕하였는가
깊은물에 다리 놓고 월천공덕하였는가
목마른 이 물을 주고 활인공덕하였는가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가 듣게 될 질문이 놀랍게도 마태복음 25장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깊은 물에 다리놓고 越川功德 하였는가’입니다. 월천공덕이란 내를 건너도록 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징검다리를 놓아주든, 다리를 놓아주든, 뼈까지 시려오는 냇물에 발을 담근 채 그를 업어서 건네주든, 사람들이 서로 내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아주 걱정스러운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수장인 베네딕토 16세가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에 저해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 이외의 기독교를 올바르지 못한 교회로 규정했습니다. 개신교는 교회라고 볼 수 없으며 그리스 정교는 교회로서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해에도 “이슬람은 사악하고 잔인한 종교”라는 비잔틴 제국 마누엘 황제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슬람권을 들끓게 했습니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가톨릭 교회가 지향하던 종교간의 화해와 평화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시절을 역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성숙한 영혼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놓인 다리를 끊은 이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는 의례를 포함하지만 의례가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삶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얽어매 부자유하게 하는 멍에를 풀어 주고, 굶주린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 주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땀흘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건입니다. 주님은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새 이름이 ‘화평케 하는 자’, ‘다리를 놓아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바람인 신바람에 사로잡혀 살아가십시오. 어둠에 갇힌 채 사는 이들에게 동터오는 새벽빛을 안겨주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7월 22일 12시 49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