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0. 생명을 택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신30:15-20
설교일시 2007/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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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택하라
신30:15-20
(2007/7/29)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 우리 시대 소묘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애를 태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이 어둠의 시간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는 그들과, 긴 기다림에 지쳐 탈진 상태에 빠진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촛불집회가 여러 곳에서 열렸습니다. 특히 불교도들이 서울 서초동에 있는 정토회관에 모여 촛불집회를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석방을 기도하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게 바로 人之常情 아니겠습니까?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의 아픔을 나누려는 따뜻함, 평화는 여기서 출발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의 반응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지러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으니 죽거나 말거나 그들 책임이라거나, 순교를 원했으니 순교 당하도록 버려두자는 말은 차마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에서 비롯된 말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청와대까지 나서서 자제를 당부했겠습니까? 저는 성경을 펼쳐 놓고 바울 사도가 열거한 말세의 징조를 찬찬히 묵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2-5a)

제게 크게 다가오는 말은 ‘무정하며’와 ‘난폭하며’라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람(human being)과 사람됨(being human)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엄마는 아기의 말 없는 말을 들으며 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기의 마음이 되어 아기와 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무정하다는 것은 이렇게 통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는 말이고, 난폭하다는 것은 그런 관계에 대한 폭력적인 거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입니다. 무정하고 난폭한 사람들은 자기와 불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의 실상을 보지 않으려고 늘 외부에 적을 만들거나 찾습니다.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속에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속에 있는 탈레반에게 굴복할 것인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 ‘아멘’으로서의 삶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 평원에 당도했습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이 막바지에 이른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꿈을 품고 애굽을 탈출했던 1세대들은 이제 거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애굽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새 삶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15)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19)

삶은 선택입니다. 똑같은 일을 만나도 밝음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도 있고, 어둠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은 바꿀 수 없다 해도,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무덥다고 투덜거리는 이도 있지만, 이 무더운 날에 누군가의 영혼에 시원한 바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름 징역살이의 고통은 가까이에서 살을 맞대고 자야 하는 동료 죄수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감옥에서 천사를 보았습니다. 열대야로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눈을 떠 바라보니 한 사람이 잠든 동료들을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더랍니다. 그는 졸지에 그 비좁은 감옥을 거룩한 곳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끔은 이웃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우리를 촉촉이 적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을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질 때라고 말하는데, 그럴 때면 세상이 참 부드러워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일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생의 태도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삶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과업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 삶은 역동적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중용 14장에 나오는 말씀은 참 새겨볼 만합니다.

군자는 쉬운 데 머물면서 하늘의 명령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저지르면서 요행을 바란다(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僥幸)

군자는 쉬운 데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사는 사람입니다. 되는 일은 되게 하지만, 안 되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쉽습니다. 그는 자기 할 일을 능력껏 하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소인의 인생이 힘겨운 것은 어떤 일을 자기 욕심에 따라 억지로 되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그래서 남들에 대한 원망과 탓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여기서 군자를 성도로 바꾸어도 무방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도와주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재판을 공정하게 하고, 자연 질서를 보존하고, 주위에 소외된 사람된 사람이 없는가 살피면서 그들 곁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 가운데는 너무 무례한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이성운 전도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영 제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이 전도사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한 장 때문에 네티즌들이 들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에서 노숙인들을 돌보며 사는 한 스님이 거리에 앉아 탁발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붉은 조끼를 입고 붉은 십자가를 든 전도자가 다가가 다짜고짜 그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무슨 무례이며 폭력입니까?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까?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이렇게 묻고 싶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신’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숙고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과의 언약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나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다소 배타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사람들은 이것을 즉시 ‘다른 종교’로 치환해서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런데 출애굽의 맥락에서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다른 신’들은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는 신들이고,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신들입니다. 다산과 풍요를 보장해준다는 신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혹적입니다. 그런 신들은 그에게 절하는 이들에게 윤리적인 삶,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내용적으로는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투사해 만든 신을 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주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나눔과 절제보다는 부자가 되는 길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교회는 주님을 믿는 이들이 얻게 될 영광만을 말합니다. 주님은 내게는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고 하셨지만, 교회는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습니다. 구제불능의 편협함이 오늘의 안티기독교도들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신자가 아닌 사람들, 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와 삶의 방식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자기 초월의 길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채워야 합니다. 모세는 우리가 생명을 택한다는 말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20)

우리 삶이 힘겨운 것은 거꾸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이나 쾌락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파생적 사랑일 때, 삶이 건강해집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를 상정합니다. 나는 사랑을 ‘자기 초월의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별을 따다서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초월이란 높아지는 것만이 아니고 낮아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의 화육에서 배웁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가감하면서 읽습니다. 불편한 말씀에는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커지는 것은 그 불편한 말씀과 진지하게 대면할 때입니다. 시골 교회 임락경 목사님이 현대인들의 건강을 위해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제목은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면하기 싫은 말씀과 오랜 시간을 보낼 때 우리 영혼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혀로 맛보고 위장으로 소화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 속에 담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정함과 난폭함, 그리고 둔감함이 우리 시대를 빙하시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세상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마음이 빗나가서 다른 신을 섬기면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경고입니다. 세상은 지금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선택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단호하게 사랑의 길을 택하고, 그 길에서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이 공동체를 살리고, 그 공동체가 나라를 살립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삶이 생명의 표징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7월 29일 12시 48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