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2. 쓴 쑥 같은 삶이라 해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애가3:19-24
설교일시 200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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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쑥 같은 삶이라 해도
애가3:19-24
(2007/8/12)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쓴 쑥과 쓸개즙
예레미야애가는 바벨론 임금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다섯 개의 노래를 모은 책입니다. 1,2,4,5장은 각각 22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절은 히브리어 자모 22개를 순서대로 배치한 것입니다. 숫자를 가지고 노랫말을 만든 각설이타령(일자나 한 자나 들고나 보오오니~)이나 춘향이 변사또에게 수청들기를 거절하여 매를 맞으면서 부른 십장가(一片丹心 굳은 마음 一夫從事 뜻이오니~)를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3장만 66절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자모 하나에 세 절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3장은 국가 전체가 겪는 어려움보다는 개인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백이 오히려 보편적인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애가의 저자는 자기 고백을 통해 시련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극심한 곤경 가운데서도 희망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았으며, 빛도 없이 캄캄한 곳에서 헤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난과 고생으로 그를 에우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까지 채우셨을 뿐 아니라, 소리 높여 부르짖어도 기도도 듣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마치 엎드려서 사람을 노리는 곰이나 사자와 같다고 했겠습니까?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시는 것 같고, 마치 돌로 이를 바수고, 그의 얼굴을 땅에 비비시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쓴 쑥과 쓸개즙이 입 안에 가득한 듯한 형국입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입술을 비어져 나오는 것은 탄식 뿐입니다. 그의 삶에서 빛은 사라졌습니다. 고난의 현실을 잠시도 잊을 수 없기에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울적하다는 말을 서양에서는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하는데, 그 말은 그리스어로 ‘쓸개즙’(담즙)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멜랑콜리를 종교적인 신념을 좀먹는 병적인 현상으로 여겨 죄악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극한 고통을 겪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화항쟁이 벌어졌던 1980년 5월의 어느 열흘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는 광주 사람들의 한의 뿌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수부대의 도청 진압 작전을 앞둔 항쟁의 마지막 날 새벽, 담장 너머 시민군 방송차량의 확성기를 타고 들려왔던 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도와주세요, 저희를 잊지 말아주세요.” 죽임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애절한 호소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두고두고 죄책과 자기 모멸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이처럼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레미야애가는 낯선 노래일 수 있지만, 쓸개즙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낯익은 노래입니다.

• 멜랑콜리
고통스런 기억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은 ‘멜랑콜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 자기의 작음과 무력함을 절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불화를 자각하는 이들의 표정이 밝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멜랑콜리는 부정적인 정서입니다. 하지만 유한함과 무력감 혹은 모멸감에서 비롯된 우울함은 때로 사람을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합니다. 멜랑콜리는 자기 성찰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뒤러(Albrecht Dǖrer, 1471-1528)의 판화작품인 <멜랑콜리아1>은 뺨을 고이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천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뒷쪽 건물벽에는 천칭과 모래 시계와 종이 걸려 있는데 마치 그것은 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사의 치마폭에는 콤파스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도형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공간에 대한 상징일 겁니다. 벽에 기대 세워놓은 사다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면서도 하늘을 향한 순례길을 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눈을 크게 뜬 채 이 무질서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찰의 눈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질 않습니다. 자기 만족에 겨운 사람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질병과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피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공허감이나 권태나 무력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때야말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에 덧붙여진 군더더기를 걷어낼 절호의 기회입니다. 애가의 저자는 울적함 속에서 곰곰이 자기를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자기 속에 있는 희망의 뿌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21-22)

너무나 갑작스런 분위기의 반전입니다. 마치 단조(minor key)로 이어지던 노래가 갑자기 장조(major key)로 바뀐 것 같습니다. 마치 세찬 비가 내리다가 환한 햇살이 비치기도 하는 요즘 날씨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숙고’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생각’에 있습니다. 동물들은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대자적으로 반응합니다. 나 좋을 대로 처신하기 않고 남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행동을 선택합니다. 혹시 좀비(zombie)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말은 돈과 출세를 인생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직장이나 공동체 내에서 무사안일에 빠져 주체성 없이 처신합니다. 그런데 좀비라는 말은 조금 더 문화적으로 진화를 해서 육신만 있고 사유하는 기능은 없는 존재를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남들을 배려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연대를 실천할 줄 모르는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좀비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겨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기억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기억을 회복할 때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생각해보면 힘겹지 않은 삶의 시기는 없습니다. 어느 때든지 고뇌는 있었습니다. 좌절과 아픔 없이 지나온 때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고, 위안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꼭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행복의 날도 지나가지만 고통의 날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해내는 순간, 고통은 나 홀로 견디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 무크타르 마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며칠 전 저는 신문을 통해 무크타르 마이라는 여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키스탄의 물탄이라는 남쪽 도시에서도 세 시간을 차로 달려야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수적인 촌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무크타르 마이는 그 운명적인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을 꿈꾸는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무크타르 마이는 13살 된 남동생이 높은 카스트의 21살 된 처녀와 대화를 나눠 그녀와 그녀 가족의 ‘명예’(honor)를 더럽힌 것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 종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그 처녀가 속한 힘있는 부족의 남자들 네 명에 의해 온 마을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단강간을 당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야만이 있는가 싶지만 이게 지금도 이 지구촌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무크타르를 사로잡은 것은 자살 충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억울해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은 바에는 한번 싸워나 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경찰서와 법정에 가서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하고, 그 가해자들을 고발했습니다. 무크타르는 관행화되어 왔던 야만의 전통에 대해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무크타르는 마을의 이슬람 스승, 미디어, 여성단체,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싸움을 계속했고 결국은 재판에서 이겨 강간범들을 비롯한 10여 명의 세력있는 남자들을 감옥에 보냈습니다. 세계의 많은 여성 단체들이 무크타르의 싸움을 지지했고, 후원금도 답지했습니다.

무크타르는 후원금과 보상금을 모아 그 지역 역사상 처음으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지금은 학교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와 염소를 키우는 농장을 만들었고, 병원을 세우기 위해 땅을 사서 기초공사를 끝낸 상태이고, 매맞는 여성들을 위한 여성센터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살아남게 했을까요? 무크타르는 그것이 이슬람의 신과 쿠란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은 정의의 신임을 배웠고 신이 절대로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절망의 나락에서 무크타르를 구한 것은 세상에 정의를 세워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더럽다고 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준 가족, 특히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때리거나 책망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이 무크타르를 위대한 영혼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가 세운 학교 벽에는 “모든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교육합니다”라는 큰 글자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한겨레, 8월 4일 자,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 교수인 현경의 글 중에서 발췌)

신앙은 고통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고통을 창조적인 삶의 계기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욥의 고통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사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고통의 현실 앞에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발돋움합니다. 물론 고통과 상처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를 몰아대지 않고 넉넉한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이들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 미래의 고향
쓴 쑥과 같은 체험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8.15 해방을 맞이한지 벌써 62년입니다. 그런데 그 세월은 고스란히 분단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의 분단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불신의 골이 조금 해소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세월은 우리 민족이 맛본 쓴 쑥과 쓸개즙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을 향한 행보가 지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하도록 성도들은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투를 빌어 말하자면 그분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나뉜 것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장벽을 당신의 온몸으로 허물고, 나뉜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어느 학자는 “통일은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밟아 보지 못한 ‘미래의 고향’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미래의 고향’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고향은 상처받고 돌아온 이들을 품어주고,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여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게 하는 곳입니다. 애가의 저자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그 고향을 떠올렸을 때 그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의 고향이신 하나님은 평화로운 곳, 생명이 넘치는 곳, 이해와 관용과 사랑이 넘치는 미래의 고향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쓴 쑥과 같은 삶이라 해도 우리의 고향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일어설 것입니다. 쓸개즙 같은 역사라도 해도 하나님께서 이미 ‘미래의 고향’인 평화로운 통일의 길을 닦고 계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온갖 장애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꿈을 여러분의 꿈으로 삼으십시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애가 저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8월 12일 12시 51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