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3. 엘엘로헤이스라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33:12-20
설교일시 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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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엘로헤이스라엘
창33:12-20
(2007/8/19)

[에서가 말하였다. “자,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 내가 앞장을 서마.”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렸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날로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야곱은 자기들이 살 집과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 엎드림과 부둥켜안음
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형제간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러하고, 에서와 야곱이 그러하고,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어쩌면 에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갈등이 없는 이상향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u-topos’ 즉 ‘없는 곳’을 뜻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갈등이 있기에 가슴 벅찬 화해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경이 전하려는 것은 불화의 역사가 아니라, 그런 현실을 넘어서는 화해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서도 에서와 야곱의 갈등과 화해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다퉜던 쌍둥이 형제입니다. 동생인 야곱은 형 에서에게 붉은 콩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고, 나중에는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남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일로 사람 좋은 에서도 격분했고, 동생을 죽이겠다고 장담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으로 이주하여 살게 됩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외삼촌으로부터 온갖 차별과 착취를 당하며 삽니다. 야곱이 하는 일이 잘 될 수록 외사촌들의 적대감은 깊어갑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그곳에서 이룬 가족을 솔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 고향은 언제라도 돌아가 안길 수 있는 품이 아닙니다. 형 에서와의 갈등관계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되나요?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가면 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아픔도 있습니다. 분단이 만들어낸 이산가족의 아픔 같은 것은 세월이 가도 희미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포한(抱恨) 진 마음은 여간해선 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에서와 야곱이 만나 화해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감동하는 것입니다. 동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에서는 사병 400명을 데리고 나옵니다. 자기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척후로부터 그런 소식을 들은 야곱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 앞에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마치 신하가 임금 앞에 예를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에서는 달려와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떤 때는 말보다 몸짓이 훨씬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형제들은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동생을 보며 형은 동생의 진심을 이해했고, 자기를 얼싸안는 형의 온기를 느끼며 동생은 형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엎드림과 얼싸안음이 만날 때 터져나온 화해의 샘물이었습니다.

• 얍복강의 어둔 밤이 없었다면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화해는 감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식구들을 앞서 보내놓고 얍복강 나루에 엎드린 채 밤을 맞았던, 그러다가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고, 엉덩이뼈를 다치면서까지 축복을 구하던 야곱의 그 ‘어둔 밤’이 없었더라면 화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속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인 야곱 대신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호명되던 그 시간,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도 건드리셨습니다. 저들 형제의 화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어둔 밤’이 없다면 성숙도 없습니다. 얼마 전 미시시피 강에 있던 다리가 붕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다리 난간에 차가 걸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사람은 그를 취재하는 기자에게 “이제 내일부터는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흔쾌히 자신을 받아들여준 에서를 보고 말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아첨의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심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여주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현존 체험은 꼭 신비 체험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통로일 수 있습니다. 이 체험을 할 때 사람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은 지난 날 가로챘던 축복을 되돌려주고 싶어 형에게 자기 재산의 일부를 드리고 싶어합니다. 에서는 여러 차례 거절하지만 끝내는 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입니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용서의 표징으로 삼고 싶었던 동생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 차이를 받아들임
이 일 후에 에서는 야곱에게 갈 길을 서두르자고 말합니다. 그는 들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차분합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과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형님께서 먼저 가시면 곧 뒤를 따르겠노라고 말합니다. 이유야 그럴 듯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감동적인 화해 이야기가 동행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야곱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어린 짐승을 염려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서둘러서 좋을 일이 많지 않습니다. 과속이 늘 문제입니다. 옛 사람은 사냥질에 뛰어다니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덕행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老子 十二章) 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혼란은 경제 성장 속도를 시민의식이 따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간혹 멈추어 서서 영혼이 좇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어리석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것들의 속도에 맞추어 걷겠다는 야곱의 말은 매우 인간적으로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흔연(欣然)히 동생을 받아들이려는 형 에서에 비해, 야곱은 왠지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길을 인도할 부하들을 남겨두고 가겠다는 형의 호의마저도 거절합니다. 이쯤 되면 에서의 마음에도 그늘이 드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동생의 두려워하는 심정까지도 헤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서는 대범합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까닭은 저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사람을 보면 불편해집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전쟁의 뿌리입니다.

사무엘 헌팅턴이라는 분은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후 세계는 이제 문명간의 충돌을 빚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말은 불행하게도 적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9.11 테러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 가시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종교의 충돌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이 중동 분쟁의 뿌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해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사람들의 가슴에 갇혀 있던 악마성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악의 세력을 뜻하는 용의 권세를 위임받은 두 짐승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세상을 제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4장은 권세를 휘두르는 용과 두 짐승의 대척점에 서있는 어린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 있는 그 어린양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입니다. 무력해 보이지만 세상의 역사는 바로 그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힘과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세상을 돌리는 회전축입니다. 오늘 전 세계의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무엘 헌팅턴의 예언이 실제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차이를 축복으로 인식하고, 서로에게 배움을 통해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하려는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 ‘숙곳’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분열의 재연이라기보다는 평화로운 공존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간 곳이 ‘숙곳’(Succoth)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야곱이 결국 정착한 곳은 세겜 성 앞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숙곳에 잠시 머물다가 세겜으로 이주했다는 말일까요? 정확한 실상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숙곳’이라는 말이 ‘초막’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이야기꾼은 야곱이 자기들이 살 집을 짓고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기 때문에 그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가리켜 ‘숙곳’이라 한 까닭은 그곳에서 반(半)정착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야곱의 처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의 자리도 숙곳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니 말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 가문으로부터 은 백 냥을 주고 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막벨라 굴을 구입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야곱의 밭 구입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형을 피해 달아나던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몇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함께 있겠다’, ‘지켜 주겠다’, ‘이 땅으로 다시 데려 오겠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돌아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이었음을 야곱은 깨달았을 겁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온갖 시련과 고통의 지층 저 밑바닥에서 유유히 성취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야곱은 구입한 땅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El, God of Israel)이라는 뜻입니다. 엘은 가나안 사람들이 만신전에 모셨던 신 가운데 최고의 신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신이 바로 자기와 동행하신 야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했던 약속에 대한 이행입니다. 야곱은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창28:21)이라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생이 계속되는 한 어려움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수복 교우의 책 표지는 황주리 화백의 그림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가지고 꾸몄습니다. 왜 ‘그래도’가 아니고 ‘그리고’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건 매우 재미있는 생각거리인데 여러분께서 직접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언약에 바탕을 둔 삶
야곱은 이제 가나안 문화 속에서 자기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느냐가 야곱에게 주어진 힘겨운 과제입니다. 최근에 저는 영국 기독교․유대교 협회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의 <<차이의 존중>>이라는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세상은 점점 단일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윤추구를 본질로 하는 시장은 공공선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을 허물고 있습니다. 지금 대안을 찾지 않으면 세상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해당사자들끼리의 계약(contract)에 바탕을 둔 삶은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기 쉽습니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해집니다. 그 차이가 심해지면 갈등도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너선 색스는 그 대안으로 계약이 아니라 언약(covenant)에 바탕을 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돌봄과 나눔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헌신하는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사회를 이런 방향으로 되돌릴 수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종교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그런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먼 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회 변화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큰 주제라고 지레 겁먹지 마십시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들 하나하나를 먼저 사랑의 눈길로 보듬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이런 우리의 삶의 경험들을 공동체를 통해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8월 19일 13시 11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