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4. 누룩없이 빚은 빵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5:6-8
설교일시 2007/08/26
오디오파일 s070826.mp3 [6740 KBytes]
목록

누룩 없이 빚은 빵
고전5:6-8
(2007/8/26)

[여러분이 자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

• 원 위치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마음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정성을 기울였던 고린도 교회가 사분오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말입니다. 신도들 사이의 파당 문제는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재산권 분쟁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이교도의 법정에 고소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성찬도 타락했습니다. 부자 교인들은 사랑의 식사 자리를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 향락의 잔치로 바꾸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교우들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탐욕과 우상 숭배, 술주정과 음행을 일삼는 이들로 말미암아 내홍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열정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세상 풍조가 교회를 삼키고 있었던 셈입니다.

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을 때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원 위치’라는 말입니다. 내무반에서, 훈련장에서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원 위치’라는 구령보다 우리를 더 맥빠지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특히 폭염 속에서 진행된 각개전투 훈련에서 포복으로 목표 지점에 거의 접근했을 때 ‘원 위치’ 소리를 들었을 땐 교관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암담합니다.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는데, 불과 몇 해가 지나기도 전에 교인들은 옛 삶으로 원 위치해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산다는데, 땀흘리고 수고한 결과가 빈 손일 때 무력감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옛 삶으로 복귀해버린 것도 기가 막힐 일이지만 바울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 것은 온갖 부끄러운 짓을 일삼는 이들이 교회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의사결정 과정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도 좀 있고, 배운 것도 많아 말도 꽤 잘했기에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오해했습니다. 이미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는 어떤 일을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자의적 신앙’(do-it-yourself faith)이라 합니다. 복음을 자기 좋을 대로 왜곡하고, 변형시켜서 믿는 것이지요. 바울은 십자가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롬9:33)라고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좋을 대로’ 내 삶을 조율해가는 과정이 믿음 생활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죽은 만졌을지 모르지만 그 핵심은 붙들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4:19-2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여러 가지 죄악 가운데서 바울 사도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 의붓어머니와 동거를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격한 말을 쏟아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자를 당장 사탄에게 넘겨주어서, 그 육체는 망하게 하고 그의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고전5:5)

바울이 이렇게 극단적인 언어를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행의 전염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 속에는 선한 것에 끌리는 마음도 있고, 악한 것에 끌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은 자기 속에 있는 어느 힘에 더 이끌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 마음에서 선한 것을 내는 사람 곁에 있으면 우리 마음도 절로 밝아지고 순수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악한 것을 내는 사람 곁에 있으면 우리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차가운 잔에 맺혔던 이슬이 뭉쳐 물방울로 흘러내리면 다른 물방울들이 그 길을 따라 흐르게 마련입니다. 똑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부정적인 것을 보기에 익숙한 사람이 있고, 긍정적인 것을 보기에 익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가는 이들은 긍정적인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쁜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탄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6b-7a)

바울 사도는 집안에서 묵은 누룩을 제거하는 유월절과 무교절 전통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구원과 해방을 향한 순례의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은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교회는 묵은 누룩을 버리지 못해서 안팎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문제가 많은 사람을 그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용납하고, 또 그의 힘에 편승하는 일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바울의 이 말을 엄정하게 받아들일 때 교회가 살게 될 겁니다.

묵은 누룩은 우리들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몸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몸은 위로도 열릴 수 있고, 아래로도 열릴 수 있습니다. 위라는 것은 하늘의 빛을 말하는 것이고, 아래라는 것은 어두운 욕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몸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것은 유혹이 있습니다. ‘탐식’(먹을 것을 탐하는 것), ‘탐색’(쾌락을 추구하는 것), ‘탐물’(소유욕)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탐욕이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노여움’와 ‘낙심’과 ‘게으름’(정신적 자포자기)가 그것입니다. 반면 탐욕이 충족될 때 사람은 영혼이 미혹되어 ‘자만’과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됩니다. 탐식․탐색․탐물․분노․낙심․나태․자만․자기 자랑이야말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여덟가지 악덕입니다.(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존 카시안의 <여덟가지 악에 대해서> 중에서)

•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
성도의 삶은 이런 묵은 누룩을 제거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굳어진 몸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몸과 마음에 밴 나쁜 습성을 고치기 위해서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이런 훈련입니다. 동양의 현인들은 몸을 닦기(修身)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正心) 한다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를 正’에 대한 자전의 풀이입니다. ‘정’자는 땅(一)에 발을 딛고(止) 바로 서 있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가 ‘바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위에 있는 ‘한 一’ 자 획을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늘에 머리를 대고 고요히 서있는 모양이야말로 ‘바름’의 상태가 아닐까요?

하늘을 잃어버려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늘’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몸과 마음을 닦기 어렵습니다. 어둠의 인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의 진실 앞에 서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해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착오일까요? 여전히 맛잃은 소금처럼 살고 있고, 여전히 어둠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소금과 빛’이라니요?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소금과 빛’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반딧불이 몇 마리를 잡아 호박꽃 속에 넣고 꽃잎을 오므리면 아름다운 호박등이 됩니다. 하지만 빛을 내는 것은 반딧불이이지 호박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호박등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패러디한 것일까요?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라던 바울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선언의 근거가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우리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인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옛 사람의 습성을 온전히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가진 사람의 슬픔입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한 우리는 옛 사람의 인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 성실과 진실을 누룩 삼으라
그래서 바울은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실과 진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어야 하고,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학술 모임에서 어느 학자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의 기독교인 만큼만 착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할 때 저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백과 찬양 소리와 기도의 음성은 높아만 가는 데, 기독교인다운 삶의 향기는 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1-24)

세상 사람들 앞에 세를 과시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사는 어쩌면 주님이 역겹게 여기시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미슈팟과 쩨다카입니다. 불의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말과 행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성실의 시작입니다. 허세와 거짓을 버리는 것이 진실의 시작입니다. 요즘 들어 학력 위조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계, 예술계, 종교계 할 것 없이 모두 허위의식의 늪에 빠져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학력에는 거짓이 없을까요? 저는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단에 서는 목사들을 볼 때마다 ‘저분들이 콤플렉스가 많은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세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몸을 낮추고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삼복이 지났지만 날이 무척 덥습니다. 하지만 무더위 속에서도 곡식과 열매는 풍성한 가을 잔치를 위해 영글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삼복의 무더위를 이겨내야 성숙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삼복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세상이 던지는 돌을 겸손하게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얼얼하고 생생한 아픔으로 우리를 개혁해가야 합니다. 성실과 진실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그 길을 단호히 택하는 이들이야말로 누룩 없이 빚은 빵입니다. 세상을 맑고 밝은 빛으로 가득 채우기를 꿈꾸는 사람들, 그래서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으로 ‘원 위치’시키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런 소망을 품고 삶을 축제로 바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8월 26일 12시 53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