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5. 빛이 생겨라
설교자 김준우
본문 창 1:1-5
설교일시 2007/09/02
오디오파일 s070902.mp3 [7393 KBytes]
목록

빛이 생겨라 (창 1:1-5) 2007/9/2 청파교회 소속 김준우 목사

9월의 첫 주일에, 아프간에서 탈레반 세력에게 42일 동안 인질로 잡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열아홉 명이 오늘 아침 귀국하였다니, 악몽의 순간들을 겪어야 했던 당사자들은 물론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하던 가족들이 얼마나 기쁠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 산악지역에서 때로는 눈도 가리운 채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그들이 얼마나 깊은 불안과 어둠 속에 지냈는지 우리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편 졸지에 살해당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의 부모님들과 그 가족들이 지금 얼마나 큰 슬픔과 어둠을 견디고 계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뜻밖에 사고로 죽게 되면, 많은 경우에 그 남은 가족들도 오랫동안 정신적인 마비상태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지내게 된다고 합니다. 가족들 사이의 웃음도 사라지고, 화목한 대화도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신뢰도 사라지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송두리째 사라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비극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그 심령이 죽은 상태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 랍비들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곧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 포로생활하던 중에 듣게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이국 땅에서 가난과 패배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포로생활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자신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 마르둑 신을 섬기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왔다는 사실은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마르둑 신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 앞에서 그들의 신앙은 뿌리 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는 신앙적 회의와 절망감으로 인해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아무리 반만 년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가장 화려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또한 요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이 아무리 한결같이 환상적인 미래를 약속한다 해도, 이 땅의 생태계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발을 딛고 사는 땅이 혼돈스럽고 공허하기만 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고 고백할 것이라 짐작합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금년 여름에 큰 수해를 당해 사망자와 실종자가 600여 명에 달하고 수재민이 40만여 명에 달한다는 유엔 보고를 보았는데, 삶의 터전을 잃는 그 많은 수재민들이 겪는 현실도 혼란스럽고 공허하기만 하며, 깊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퇴원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이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슬픔도 끝 모를 깊은 어둠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해고 노동자들과 800만 명이 넘는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온갖 차별과 실업의 불안도 끝 모를 깊은 어둠일 것입니다.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일상화된 구조조정과 고용불안, 성과주의, 장시간 노동, 작업속도의 증가로 인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가고 있는 형편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깊은 어둠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해고된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들의 단순히 생계대책만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정체성, 사회적 지위와 인간관계까지도 송두리째 무너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이런 일들 이외에도 많은 아픔과 슬픔, 깊은 어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두운 카오스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아이들이 한밤중에 우는 소리가 들리면, 급히 달려가 불을 켜고 아이를 끌어안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세상에서, 당신의 귀한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이 그처럼 고통과 깊은 어둠 속에 헤매는 모습을 보시고 무엇보다 먼저 빛을 창조하십니다.

2. 빛이 생겨라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하나님이 언제 빛을 만드셨고 언제 태양을 만드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3-5절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을 첫날에 만드시고 그 빛과 어둠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4-19절에 보면 태양과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드셨다 했습니다. 그처럼 태양과 달을 넷째 날에 만드셨다면,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첫째 날이 지나고 둘째 날이 지나고 셋째 날이 지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창세기 1장이 단순한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창세기 1장에 태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생활할 당시에 태양이란 곧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대세계의 제국들은 이집트제국이든 바빌로니아제국이든 태양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이처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지금 그분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가 이처럼 깊은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데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하는 절박한 물음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깨우쳐주십니다. 폭력으로 왕족을 먼저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으로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총칼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마르둑 신처럼 남의 나라를 정복하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가는 제국과 폭력의 신이 아니라, 해방과 구원과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론 제국의 신 마르둑이 아무리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을지라도, 실제로 마르둑 신은 많은 약소민족들을 정복하고 학살하고 노예로 만드는 어둠의 괴수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 말씀입니다. 어둠의 세력일수록 자신을 정반대로 태양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학살하고 억압하고 착취하여 평화를 짓밟는 마르둑 신을 태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제국의 거짓논리이며 거짓 선전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국이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과 화려한 위용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창조 첫날에는 빛을 만드셨고, 마르둑 신의 상징인 태양은 넷째 날에 가서야 겨우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자신들의 전통적인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 사람들을 향해, 비록 너희들이 강대국이라고 우리를 짓밟았으며 우리를 포로로 끌어다가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한다 하더라도, 너희의 신 마르둑 곧 태양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마음속으로나마 당당하게 주장하고 저항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그러잖아도 수많은 고통들과 슬픔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데, 세상 제국들은 시시때때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노예로 잡아다가 마음대로 부려먹기 때문에 약소민족들에게 가장 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제국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막강한 원수이며 사탄의 짐승입니다(계 1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구원활동은 제국들의 억압과 착취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으켜주고, 그 거짓 논리와 거짓 선전에서 벗어나도록 깨우쳐주며, 그 억압과 착취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고, 마침내는 그 제국들을 멸망시키는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고대세계의 모든 제국들, 곧 이집트제국, 바빌로니아제국, 페르시아제국, 그리스제국, 로마제국뿐 아니라, 중국역사의 여러 제국들과 몽고제국, 일본제국 등 모든 제국들은 아무리 강대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스스로 세계 최강의 제국임을 천명하면서, 그 사실을 자랑하면서, 전 세계의 약소국가를 마음대로 선제공격하며 지배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국을 멸망시키고야 만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불의와 억압과 깊은 어둠은 세상이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니까 체념하라고 속삭이는 것은 강대국들의 지배논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겪는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 역시 힘센 사람들의 지배논리이며 제국들의 종교일 뿐입니다.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에 체념하고 힘에 순종하라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사탄의 뜻에 사로잡힌 탈레반 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흔히 뜻하지 않은 사고나 홍수, 혹은 쓰나미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 역시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흡혈귀로 만들거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속 좁은 부족신으로 능멸하는 시대착오적인 거짓 신학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주장 역시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라 오로지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거짓 신학일 뿐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참 진리를 갖고 있고, 다른 종교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내가 믿는 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 역시 시대착오적인 제국종교의 지배논리를 믿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흉악범죄가 많고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사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신을 섬기고 제국의 생활방식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경제성장만이 살길이며, 소득증대와 경제제일주의가 최고의 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과 사회정의와 사회적 평등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폭력과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원리를 신처럼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국의 논리를 따라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계화를 통해 극심한 경쟁을 구조화하여,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가르치는 매스컴들의 주장 역시 이 세상의 혼돈과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드는 제국의 생활방식을 추종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한미 FTA를 통해 심지어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는 주장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농업을 몰락시키는 논리도 강대국의 거짓 선전일 따름입니다.

3.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길
기독교인이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곧 종교와, 나라 곧 정치가 결합된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 토 테우’라 하는데, 당시의 유일한 ‘바실레이아’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로마황제가 다스리는 제국 대신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바실레이아,’ 곧 하나님의 제국을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제국에 맞서서 하나님의 통치(정치)를 이 땅위에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 제국의 원리는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경쟁과 적대감, 서로 차별하고 배제하며, 약자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원리입니다. 자신이 첫째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서로 섬기며, 나누고 협동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 높게 여겨 스스로 꼴찌가 되고자 하는 원리입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성직자가 타락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 제국의 원리를 교회 안에서조차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온갖 고통 속에서,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연약한 우리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 속에서 깊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어둠 속에 머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셔서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분명히 믿기를 원하십니다. 뜻하지 않은 고통을 겪게 될 때, 그 고통에 대해 분노하거나, 하나님께 대해 분노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내려주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그 고통이 무서워서 피하려는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뜻밖의 고통 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친구의 아버지는 간질병을 앓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여있기에 가보았더니 자신의 아버님이 발작을 일으키며 누워계셨답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 부끄러웠던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답니다. 그런 참담함 속에 나이가 들면서도 젊은 시절 그의 가슴속에 떠나지 않는 아픔과 슬픔은 인간의 고통에 관한 문제였고, 매일 시골교회당에 걸린 십자가 앞에 나아가 기도하던 중에,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 통곡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이 세상의 막강한 군사력을 휘두르는 제국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당하실 줄 알면서도 두려움 없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 세상의 폭력과 증오를 끝내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과 희생뿐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포악함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저들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하는 길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걸어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열심히 뒤따르며, 서로를 섬기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조차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믿음입니다. 탈레반의 총구 앞에서, 자신도 설사를 하여 기진맥진했지만 자기 대신 동료가 먼저 풀려나도록 한 이지영 씨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그 고통 속에서,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그 고통과 어둠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며, 제국의 생활방식을 하나님 나라의 생활방식으로 이길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깊은 어둠 속에서 지금도 무엇보다 먼저 빛을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우리가 용감하게 이 세상의 깊은 어둠과 고통의 바다를 헤쳐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깊은 어둠의 세상 속에 작은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의 깊은 어둠을 빛으로 물리치는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를 간절히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남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때,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낙심하게 될 때, 우리의 가족이 우리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슬픔과 아픔이 너무 많고 어둠이 너무나 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시는 일이 그처럼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나 몰라라 하고,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제국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 록 날 짜 2007년 09월 02일 13시 05분 0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