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6. 회의를 거친신앙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20:24-29
설교일시 2007/09/09
오디오파일 s070909-1.mp3 [8007 KBytes]
목록

회의를 거친 신앙
요20:24-29
(2007/9/9)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도마라는 사나이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이름은 듣는 즉시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대나무’ 하면 지조와 절개가 떠오르고, ‘밤나무’ 하면 밤꽃의 그 비릿한 냄새가 떠오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하면 즉시 배신자가 떠오르고, 나발 하면 어리석은 자가 떠오릅니다. ‘빌라도’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떠오릅니다. ‘도마’ 하면 의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거의 습관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도 복잡합니다. 우리가 악인이라고 규정짓는 사람도 선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고, 참 좋은 사람으로 믿는 이들에게도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부로 규정짓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선과 악의 경계선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마라는 이름은 공관복음서마다 등장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만 나옵니다.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그는 캐릭터(character)를 지닌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충직한 제자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까스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요단 강 건너 쪽으로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자 주님은 또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위협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확고합니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도마가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 그는 자기 속에 일고 있는 두려움을 떨치면서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은 14장입니다.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시면서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 그는 모르면서 침묵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시인하고, 또 물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배움을 향해 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의심 혹은 불신앙
도마가 세 번째 등장하는 대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도마를 일컬을 때 ‘의심 많은’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긍정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의심이 많다는 말은 자칫하면 불신앙과 등치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저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말을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의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믿는 척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지성의 희생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따지기 좋아하는 골치 아픈 청년이었습니다. 청년회 선배나 지도 교사들이 더 이상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때 제게 들이대던 말이 뭔지 아십니까? “너 시험 들었구나?” 그래도 내가 수그러들지 않으면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너 지금 사탄이 시험하는 거야.” 저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과연 의심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안 될 불경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의심 없는 확신, 맹목적인 신앙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회의를 모르는 성스러움은 폭력과 손을 잡기 쉬운 법입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얼마나 타인에 대해 폭력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계몽된 영혼의 특색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인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심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뭔가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모호한 것입니다. 빛과 어둠,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삶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의 오감으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이상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사기꾼에게 넘어가는 까닭은 그들이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번민했을 것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한 입인 듯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지만 자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25)

도마의 이 딜레마는 어쩌면 부활 증언 앞에 서있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처, 희망의 샘
도마가 회의의 숲에서 방황하고 있는 데도 주님은 즉시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을 때 주님이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주신 주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7) 하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도마는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을까요? 이 장면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이처럼 긴장된 장면은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 그림 중에서 제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입니다. <의심하는 도마>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의 배경은 어둡습니다. 화면 한복판에는 네 사람의 등장인물이 한 덩어리인양 모여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 위를 비추고 있는 빛은 그들의 심리적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옆구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로로 벌어진 창날의 상처가 깊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손목을 붙들고 상처의 절개부를 만져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등에는 못자국이 뚜렷합니다. 도마가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흔을 헤집는 동안 다른 제자들은 시선으로 그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도마의 손목을 잡아 당신의 상처에 손을 대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습니다.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책망하시기보다는 그를 진정한 믿음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 당신의 상처를 기꺼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도마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마침내 회의의 밤이 지나간 것입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이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신 영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다가와 당신 몸의 상처를 보여주셨을 때, 도마의 눈에 드리운 회의의 비늘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눈은 무엇을 좇고 있습니까? 영광을 구하는 이들의 눈에는 주님의 상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상처 입은 이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들이 내보이는 상처와 고통에 눈길을 줄 때 우리 눈이 열릴 것입니다. 이런 일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마더 테레사입니다.

• 마더 테레사
9월 3일 자로 발간된 미국의 시사주간지

등 록 날 짜 2007년 09월 09일 13시 00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