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7. 속에서 자라는 생명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4:26-29
설교일시 200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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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자라는 생명
막4:26-29
(2007/9/1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 삶의 모든 순간은 파종의 때
가을의 길목에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뜨거운 햇볕과 시원한 바람 대신 비가 내리니 농부들의 시름이 깊어지겠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역시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일 겁니다. 엊그제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30분이나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질주하는 차들이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고 가고, 들고 있는 가방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었고, 구두도 물을 머금어 묵직하게 변했지만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아주머니 한분이 결국 버스 기사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일부러 늦게 온 것이 아닌데도 그 아주머니는 자기 속에 쌓인 화를 누군가에게 풀어놓아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봐야 서로 불편할 뿐인데 말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인생은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지요?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마음을 어떻게 닦을 수 있을지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마음을 닦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마음의 주인이신 주님께 그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마음의 제물이라 했습니다. 내가 문제임을 인정하고, 그 못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 지방의 평화를 만드는 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동완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역임하셨으니까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분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당당하셨고,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남달랐던 분이기에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은 제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너털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던 목사님은 참 씩씩해보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넉넉히 극복하실 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또한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어했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그리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40여 년을 벗으로 지내온 어느 목사님도 친구의 속내를 읽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황망하게 그분과 작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고 이 척박한 역사 위에 좋은 씨를 뿌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추수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파종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투와 표정, 몸짓과 마음 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북경 하늘을 나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 달에 미국에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렇게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물코 하나를 잡아당기면 거기에 연결된 다른 그물눈들도 다 함께 출렁이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삶이 엄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 속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좋든 싫든 우리는 지금 뭔가를 파종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그 씨앗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살맛으로, 기쁨으로 성장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저절로’ 자라는 씨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린 한 사람을 비유의 소재로 삼고 계십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은 뿌려진 씨앗보다 더 많은 결실을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누가 햇볕에 그을리면서, 소금땀을 흘리며 파종을 하겠습니까? 씨를 뿌린 농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밭을 살핍니다. 새들이 날아와 밭을 파헤치지는 않았는지, 밤사이에 들짐승이 밭고랑을 망가뜨리지는 않았는지, 땅강아지가 흙을 부풀게 하지는 않았는지…. 비가 내릴듯하면 물고랑도 만들어 주고, 잡풀을 뽑아냅니다. 농부는 정성을 다합니다. 어느 날 새벽 문득 솟아난 여린 새싹과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은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 해도 그 가슴이 살짝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싹을 틔운 것은 농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농부에게는 싹을 틔울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은 생명이 움트고 자라는 그 과정을 ‘저절로’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절로’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저 스스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힘으로’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저절로 자란다는 말은 생명의 성장에는 인위적인 노력이 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맥락을 제거하고 보면 이 말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점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은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는 이들의 노고를 무화시키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만일 우리의 선한 노력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증과 숙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의 신학자들은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하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그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굳은 믿음에 경의를 표할 수는 있지만 왠지 그 말이 미덥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조차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오늘의 본문은 열혈당원들의 요구라는 맥락 가운데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식민 모국인 로마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무리로 봅니다. 따라서 그들을 쳐부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꿈꾸는 이들의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아니, 폭력이 아니고는 로마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조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있습니다. 마치 땅 속에 묻힌 씨앗이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역사는 추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서두를 것도, 지체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꾸준히 나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선과 악이 뒤엉킨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우리는 섣부른 희망을 가졌다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를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진보라는 게 무엇입니까? 소득이 늘어나고, 문명의 이기들을 마음껏 사용하며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배우지 못하고,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역사는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은 ‘저절로’ 자라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자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진보는 우리의 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꿈이라는 사실을 이 비유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우리가 할 일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고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가끔 우리의 선한 노력이 헛되이 끝나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돕고, 일으켜 세워주고, 필요를 채워주려는 노력이 아무 결실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 목회자들은 맥이 빠집니다. 하지만 절망은 불신앙입니다. 전한 말씀이 진리이고, 건넨 손길이 사랑임이 분명하다면 언젠가는 그의 존재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먼 길을 우회하다가 마침내 어린 시절에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싹이 터서 교회로 돌아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땅 속에서 발아하는 씨앗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지금 우리는 금권 정치, 제국주의, 그리고 근본주의가 동시에 권력으로 부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입니다. 그것은 부자는 더욱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은 체제입니다. 그런 경제질서는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미국의 의도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배후에는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 약탈적인 질서를 부추기는 것은 놀랍게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망령입니다. ‘근본주의’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판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의 정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니다. 잃어버린 예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 정신의 핵심은 권위주의와 지배에 대한 거부입니다. 교회가 권력으로 변할 때 예수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저는 가슴에서 돋아나는 절망을 희망의 칼로 베어내면서 예수 정신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보고 있습니다. 가슴 시린 사람의 옷이 되어주려고 애쓰는 이들, 배고픈 사람을 어떻게든 먹이려고 애쓰는 이들, 고독한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그런 이들을 귀히 보십니다. 얼음을 깨뜨리는 것은 망치가 아니라 바늘입니다. 금권 정치와 제국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의 얼음을 깨는 것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며 세상에 틈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해 보이는 나무 뿌리가 바위를 깨뜨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비전과 용기입니다. 희망은 연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희망처럼 강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이미 시작하신 일에 동참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친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在日三代史’라는 일인극을 보여주신 동경 고려박물관의 송부자 장로님의 삶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처음 듣는 순간 그의 몸에는 전율이 흘렀고, 그 이후의 삶은 온전히 그 말씀을 육화하려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말씀과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가해자나 희생자나 모두가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그의 투쟁의 배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저 밑바닥의 해류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생명은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면의 질서에 눈을 뜬 사람,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희망을 돛을 올려 성령의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속에서부터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 잇댄 희망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그의 이끄심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9월 16일 12시 59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