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8. 젊은 그대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후 2:22-26
설교일시 2007/09/23
오디오파일 s070923.mp3 [2838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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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대
딤후2:22-26
(2007/9/23, 청년주일)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하십시오. 그대가 아는 대로, 거기에서 싸움이 생깁니다.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악마의 뜻을 좇았지만, 정신을 차려서 그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 88만원 세대
가을의 분기점에서 우리는 한가위 명절을 맞고 있습니다. 올해는 보름달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긴 연휴를 이용해 해외로 나가는 이들이 많아 인천공항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들뜬 표정으로 거리를 지나는 이들이 다 정겹게 보입니다. 왠지 숫되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고향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고통인 이들도 있습니다. 명절이 되어 시댁에 간 며느리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은 “더 있다 가라”는 말이랍니다. 젊은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은 “아직도 노냐?” “올해는 결혼해야지” 등이랍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도 그런 말만 골라서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태백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십 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이태백 하면 달구경하다가 물에 비친 달빛에 이끌려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그의 일화가 떠오르게 마련인데, 그런 낭만적인 울림을 가진 이태백이라는 기표(시니피앙) 속에,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젊은이들의 현실이 투영되니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어느 정도 직업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수입도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려면 최소 50:1 이상의 경쟁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기면서도 가고 싶은 직장을 골라서 갔는데, 그건 먼 옛날의 추억일 뿐입니다. 어느 경제학자는 지금의 20대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20대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총계를 아직 취직을 못한 이들, 비정규직으로 있는 이들, 그리고 정규직으로 일하는 젊은이들 전체의 숫자로 나누면 88만원 정도가 된답니다. 질풍노도의 세대니, 민주화 세대니 하는 시대 구분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런 구분법을 보면 젊은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의 깊이가 절로 느껴집니다.

지금 젊은이들의 맥 빠진 모습은 우리 사회의 위기의 징조입니다. 한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지켜가려는 기성세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현실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뭔가 대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노력도 절실합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구조적으로 기존 질서에 투항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제 기존 질서가 정해놓은 길로만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이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젊은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본시 하늘의 뜻에 비추어 오늘을 극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脫-向’이라는 함축적인 언어로 요약했습니다. 출애굽사건은 애굽을 ‘脫’ 하여 가나안을 ‘向’한 길 떠남이었습니다. ‘脫-向’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숙한 인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벗어나야 할 우리의 애굽은 어디이고,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 지양과 지향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지금의 터키 땅인 루가오니아 출신인데, 바울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때 발탁된 전도유망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바울을 대신해 데살로니가, 고린도, 빌립보 교회를 방문해 바울의 뜻을 전하고, 또 교인들의 신앙을 잘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확고한 믿음 가운데 서 있다 해도, 세파에 부대끼다보면 흔들리기도 하고, 분노를 자제하지 못할 때도 있고, 터무니없는 욕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신앙적 멘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가까운 데서 지켜보면서 우리에게 충언을 해준다면 우리는 한결 수월하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몇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2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셋입니다. ‘피하고’, ‘함께’, ‘좇으십시오’. 성숙한 존재로 커가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래적인 에로스를 부정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과도하여 넘치는 일이 없도록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욕은 억누르려고 하면 그 힘이 더 커집니다. 떨쳐버리려고 하면 그 힘은 더욱 강력해져서 우리를 사로잡아버립니다. 방법이 없나요? 있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 눈길을 주면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아 자신의 종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을 바라보면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이 우리를 채워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매개된 욕망’입니다. 사람들이 비싼 운동화를 신는 것은 디자인도 예쁘고 발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동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늘 만나는 누군가가 그것을 신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신은 운동화를 보는 순간 우리 마음에 불꽃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괜히 인생이 쓸쓸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광고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 ‘욕망’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걷다보면 내 마음의 키가 저절로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는 ‘거룩함 聖’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거룩할 聖’ 자에서 ‘귀 耳’ 옆에 있는 ‘입 口’ 자는 신의 뜻을 물어보는 축문이 담긴 그릇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들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됩니다.

정욕으로부터 벗어났으면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여러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말 자체로 뜻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이 권태롭고 무겁고 쓸쓸한 것은 삶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향한 순례자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인생의 비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악마의 올무
삶의 지향이 분명한 사람은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으로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습니다. 논쟁을 통해 승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성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논쟁의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논쟁도 일종의 ‘싸움’인지라, 논쟁을 하다보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입히기도 합니다. 논쟁을 통해 건전한 결론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만 확인하고 불쾌감 속에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논쟁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하면 논쟁처럼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이란 무엇입니까? 논쟁을 위한 논쟁, 말을 위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 후배를 만났는데, 무슨 이야기 끝에 지난 주에는 “착하게 살지 말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사실 이것은 전도서 7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후배는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는 표정이 밝아지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 소리도 못하고 살고, 억울한 일 만나도 꾹 참고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착하게 살지 말자’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어느 목사님은 <<역도산>>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착한 척 하며 살지 말라’는 말에 필이 꽂혀서 뭔가 중대 결심을 했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면 약간 성질이 까칠한 사람들이 재미있게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늘 남을 배려하며 사는 일이 사실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꾼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요구이기는 하지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자꾸 자기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누군가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정죄하는 자세나, 도덕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며 훈계하려 들면 안 됩니다. 그런 태도 앞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문을 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화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와 우리를 악마의 올무에서 건져내십니다. 악마의 주 특기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인종, 계급, 피부색, 지역, 문화, 빈부, 남녀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뉜 것들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흘러 서로 소통하게 합니다. 죄는 소외시키는 힘이지만 사랑은 ‘하나’되게 하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나는 특히 청년들이 이런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쟁 지역에 들어가 평화를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개척자들>의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맑습니다. 그 맑음은 자아를 여읜 자들의 맑음입니다.

• 우분투가 있는 사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로부터 아프리카의 응구니(Nguni)족의 단어 하나를 배웠습니다. ‘우분투 ubuntu’라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인간됨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인데 번역하기가 참 어렵다고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속 깊은 사정을 헤아리고, 그의 연약함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응구니 족은 관대하고 따뜻하고 좋은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ubuntu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답니다.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분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야말로 우분투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자기 문제와 아픔에만 몰두할 때 우리 영혼은 점점 작아집니다. 다른 이들의 문제와 아픔에 공감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자랄 때 우리 영혼은 커집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것은 존재로서의 목표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의 문제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이냐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살벌한 경쟁의 벌판으로 몰아댑니다. 그 쳇바퀴 속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 가진 것 없다고 주눅 들지 않고, 남보다 조금 뒤쳐졌다고 낙심하지 않는 사람,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려주면서 기꺼이 그의 동행이 되어주는 사람…이런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나아질 것입니다. 오래 전에 김수철 씨가 불렀던 <젊은 그대>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노래는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아아”로 이어집니다. 이 대목을 부를 때면 절로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나는 이 땅의 청년들이, 그리고 특히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자본주의 질서가 우리 의식에 흩뿌려놓은 욕망의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 모두가 사람 대접받으며 살아가는 내일의 희망을 향해 힘차게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젊은 그대, 무기력의 베일을 벗고 일어서십시오. 아름다운 세상을 열기 위해 주님이 앞서 걸으셨던 그 길로 내달리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9월 23일 13시 14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