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9. 바로 보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8:9-14
설교일시 2007/09/30
오디오파일 s070930.mp3 [652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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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8:9-14
(2007/9/30)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선명한 대조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대조되는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입니다. 좀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경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위선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그만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신앙생활을 제일 모범적으로 하는 사람을 머리에 그려보시면 될 겁니다. 거기에 비해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로 지탄받는 사람으로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고의 이야기꾼답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를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자화자찬 식 기도는 청중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구하는 세리는 오히려 동정심을 일으켰을 겁니다. 청중들의 의식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났겠지요? 게다가 주님은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비유를 기도하는 이들의 바람직한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올바른 기도의 방법이나 자세 혹은 태도를 가르치기 위한 모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리의 기도를 본받으려고 애씁니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세리의 기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투 캅스>라는 영화에서 안성기 씨는 악덕 형사 역을 맡았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고, 폭력을 사용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도 주일이면 교회에 갑니다.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 죄 많은 놈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영락없는 세리의 모습입니다. 그 악덕 형사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시인 최승호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많이 봐서인지 교회를 가리켜 ‘자동세탁기’라고 질타했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죄를 다 짓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 받은 기쁨을 안고 세상에 나가 이전과 똑같이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세리의 기도가 오용될 수 있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 ‘나는 다르다’는 의식의 악마성
이 비유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그런 그릇된 확신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주님은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어떤’ 바리새파 사람과 ‘어떤’ 세리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바리새파 사람 ‘일반’과 세리 ‘일반’을 비교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주님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인백색이란 말이 있듯이 겸손한 바리새파 사람도 있고, 오만한 세리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속이거나 간음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미덕의 과시는 그의 내면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경건행위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과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세리와의 비교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중간을 괄호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이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은 악마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줄 아십니까? 다른 이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보듬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르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남과 자신을 마주 세워놓고 비교합니다. 그를 몰아대는 것은 경쟁의식입니다. 그러니 남들을 위한 여백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이들도 선한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멸시의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바리파 사람의 ‘이 세리’라는 표현 속에는 그에 대한 노골적인 손가락질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 가운데 손가락질처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게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지금 기도를 가장한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나는 가끔 기독교인들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말투며, 행동거지가 오만한 주인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 이들을 누이처럼, 어버이처럼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바리새파 사람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비록 아프기는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부자로서 교회를 바라보기보다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교회를 보는 일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나는 타매의 대상이 된 교회의 지도자들과 다르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제게 메일을 보내 깊은 산의 찬 샘물이 탁류에 도매금으로 휩쓸려가는 게 속상하다며 염려를 하셨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도 역시 탁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며 구별하기에 바빴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눈에 파묻혀 달콤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교회 성장의 단꿈에 취해 있는 이들을 깨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야말로 영혼의 질병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람을 보는 새로운 눈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은 바리새파 사람에게 가까울까요? 세리에게 가까울까요? 아무래도 바리새파 사람 가까이에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어디에 서 계신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본문을 조금 세심하게 살피면 이런 관찰은 뭔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 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14a)

자,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파 사람을 ‘저 바리새파 사람’이라 하고, 세리를 ‘이 세리’라고 지칭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마치 세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랬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했던 바리새파 사람은 영적으로도 예수님으로부터 먼 곳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빌었던 세리는 주님과 멀리 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사용한 ‘이 세리’라는 표현에는 경멸이 담겨 있지만, 주님이 사용한 ‘이 세리’라는 표현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말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뜻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이는 세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 선언인 줄 아시겠습니까? 그때까지는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현실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바리새파 사람의 전유물이었고, 세리는 늘 불의한 자였을 뿐입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런저런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편견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보지 않습니다. 만해 한용운 님은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서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편견은 사람에게서 민적을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지역과 인종에 대한 차별은 얼마나 강고합니까? 마치 오리가 알에서 부화하여 처음으로 만나는 대상을 어미로 여겨 따라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문화적으로 각인된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편견을 깨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도운 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 일반이 유대인보다 낫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다 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선입견에 틈을 만들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 소리 내지 않고 문 닫기
말은 부드럽고 겸손한데 속에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경건하고 좋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차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1960년대 중반에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 신부가 반전 운동 평화 운동가인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을 만났습니다. 둘은 첫 눈에 서로의 사람됨과 영성의 깊이를 알아차렸고, 종교도 달랐고 10여 년의 나이 차가 났음에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토마스 머튼은 틱낫한에게 명상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틱낫한은 베트남에서는 절에 들어가서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명상을 허락받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소리 내지 않고 문 닫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 한 마디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중뿔나게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 정성스럽게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밤새워 드리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찬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스스로의 경건에 도취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때 우리 모두의 존재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자랑과 과도한 욕심과 불평의 뿌리가 뽑히고, 그 자리에 겸허함과 정성스러움과 소박함과 감사가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정성스러움’, 이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한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09월 30일 13시 07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