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0. 브엘세바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26:26-33
설교일시 2007/10/7
오디오파일 s071007.mp3 [566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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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세바
창26:26-33
(2007/10/7, 세계성찬주일)

[아비벨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에게로 왔다. 이삭이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이렇게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그들은 대답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맞아서 잔치를 베풀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서로 맹세하였으며, 그런 다음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 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그들이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나왔다고 보고하였다.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라고 부르니,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 우물이 있는 성읍을 브엘세바라고 한다.]

• 두 풍경
지난 주중에 우리의 이목은 평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 위에 잠시 멈췄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면서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20여 년 전 저는 전방에서 군목으로 활동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저는 처음으로 철책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는 GP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방탄조끼를 입고 계급장과 부대 마크를 가린 채 경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GP로 걸어 들어가면서 우리가 분단국임을 절감했습니다. 벙커 안에 있는 포대경으로 군사분계선 저 너머를 바라보다가 나는 얼어붙은 듯 한 곳에 시선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철책 저 편에서 아기를 업은 채 고추를 널어 말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도 친숙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외계인을 보듯이 그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유사함이 주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분단이 무엇인지를 실감했습니다. 지금이야 북한 주민을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출퇴근을 하는 형편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평양에서 긴장감 속에 정상회담을 하고 있던 그 시간, 서울역 앞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정상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 손에 나눠든 사람들은 우상의 나라 북한은 철저히 때려 부숴야 한다는 어느 목사의 설교에 열광적으로 아멘을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게 한국 교회 현실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니 암담하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말은 어디로 가고, 정죄와 미움과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그렇게도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신앙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희망의 조짐도 있고 절망의 조짐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쪽에 눈길을 주고, 어느 쪽에 힘을 보태줄 것인가 입니다. 혼돈 속에서 잠시 망연자실했던 제게 다가온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이 제게 빛이 되어주었습니다.

• 우물 이야기
이삭은 기근을 만나 자기 고향 땅을 떠나 그랄 땅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인 셈입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겁니다. 어디에 가든 자기 집인 듯 편안한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삭은 후자에 속할 겁니다. 이주자들에게 관대했던 그랄 왕 아비멜렉 덕분에 이삭은 그런대로 그 땅에 정착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 이삭이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어가면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뜨내기가 그 땅에서 거부가 되어 살자 원주민들의 감정이 상했던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데 이주자가 자기들보다 부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그들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삭의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리는 것으로서 자기들의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을 떠나라는 경고인 셈입니다. 우물은 유목민들에게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분쟁이 잦아졌습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된 셈입니다. 이쯤 되자 아비멜렉도 더는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떠날 것을 명합니다.

이삭은 또 다시 나그네가 되어 낯선 곳으로 이주합니다. 여러 해 동안 닦아온 삶의 터전을 또 다시 떠나야 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십시오. 도시를 떠난 그는 그랄 평원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로 작정하고는 그곳에서 제일 먼저 우물을 팠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목초지와 더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을 얻기 무섭게 그랄 목자들이 나타나 자기들의 물을 가로챘다고 시비를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옛날 농촌 사람들의 물꼬 싸움을 기억하는 분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농부들은 자식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과 자기 논에 물이 들어가는 것을 가장 아름답게 여긴다고 합니다. 가뭄이 심할 때 물 싸움은 죽고사는 싸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삭이 팠던 우물에 각각 ‘다툼’을 뜻하는 ‘에섹’과 ‘반대’를 뜻하는 ‘싯나’라는 이름을 붙인 것만 보더라도, 물 문제가 유목민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포기하고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그때는 그랄의 목자들이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은총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삭은 주님께서 살 곳을 넓히셨다 하여 그 이름을 ‘넓은 곳’을 뜻하는 ‘르호봇’이라 지었습니다. 르호봇에 이르기 위해서는 에섹과 싯나를 거쳐서 가야 하는 게 어쩌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에섹과 싯나를 통과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불화와 갈등 때문에 마음의 안식이 없는 이들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야말로 세 번째 우물 파기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의 지경을 넓혀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계약 체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이삭은 좀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삶의 자리를 또 한번 옮기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보호와 번성을 약속해주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랄 왕 아비멜렉이 자기의 최측근 인사인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옵니다.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삭은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이렇게 쫓아내시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하고 불퉁거립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정말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랄 성읍을 떠나기 전과 후의 이삭의 행적을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그리고 그런 위기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를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선교란 ‘매력의 감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행2:47)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삶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삭이 뭐라 말하지 않아도 아비멜렉은 이삭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아비멜렉은 이삭과 더불어 불가침 평화 조약을 맺기 원합니다. 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의전입니다. 왕과 계약을 맺는 사람은 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인 아비멜렉이 떠돌이 목자에 불과한 이삭을 계약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국가 형태를 갖추고 주위 나라들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되었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당부가 그런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계약은 두 가지 절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공동식사입니다. 이삭은 아비멜렉 일행을 맞아서 잔치를 베풀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둘째는 상호 맹세입니다. 이렇게 해서 평화 조약은 맺어졌습니다. 이삭이 아비멜렉을 배웅한 후에 종들이 와서 그들이 판 우물에서 물이 터져나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들이 맺은 평화 조약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마련하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세바’라고 불렀는데, ‘세바’는 ‘맹세 또는 일곱’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중에 그 우물이 있는 성읍은 ‘브엘세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 뜻은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 우물’입니다.

• 브엘세바로 살아가기
지금까지 남과 북은 ‘에섹’과 ‘싯나’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대립과 갈등과 의구심 속에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갈 길이 여전히 멀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르호봇’으로 다가오시어 우리가 설 땅을 넓게 만들어 주셨고, 마침내 우리를 일곱 우물이 있는 곳 ‘브엘세바’로 이끌고 계십니다. 이 한반도가 일곱 샘물이 넘치는 곳이 되어, 평화에 목마른 세상에 생수를 제공하게 될 날을 저는 꿈꾸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낼 때 평화와 공존의 새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세계를 일치와 화해로 이끌도록 소명을 주시는 주님의 뜻에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쩌면 ‘마이너리티’(소수자)의 눈으로, ‘디아스포라’(이주자)의 눈으로 현실을 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살 권리를 확보해주려고, 세상의 아픔을 보듬어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절망의 조짐도 많지만, 우리는 희망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나의 꿈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꿈을 품고 브엘세바, 즉 일곱 우물과도 같이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0월 07일 12시 09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