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1. 축복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한3서 1:1-4
설교일시 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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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복
3요한1:1-4
(2007/10/14)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신도들 몇이 와서, 그대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그대의 진실성을 증언해 주는 것을 듣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 생명의 모태
그리스어 원문으로 신약성서에서 가장 짧은 책인 요한3서에는 편지의 수신자인 가이오 외에도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라는 두 인물이 더 등장합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교회는 떠돌이 설교자들을 영접하는 문제를 두고 갈려 있었습니다. 낯선 이들을 맞이하여 그들이 영적으로 재충전하여 주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낯선 이들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환대와 냉대 사이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가이오가 환대의 전통을 세우려 한다면, 디오드레베는 냉대의 길로 교회를 이끌어가려 합니다.

가이오는 사람들에 의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또 신도들은 물론이고 ‘낯선 신도들을 섬기는 일’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공동체에 소개되고 있는 데메드리오도 가이오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삶으로 좋은 평을 받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를 든든히 세우는 이라 하겠습니다. 거기에 비해 디오드레베는 낯선 설교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주는 일을 거절할 뿐 아니라 방해합니다. 어쩌면 그는 합리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합니다. 우리 밖에 있는 ‘그들’은 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그 공동체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을 부정적인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는 그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무엇이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일인가 보다는 자기 영향력을 확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의 뜻’을 강조하는 이의 목소리가 커지면 공동체의 사랑은 식게 마련입니다.

사랑이 식은 곳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용납하시어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흑암의 땅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아니라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생명과 평화 공동체의 모태입니다. 한때 천재라고 칭송받던 축구선수 고종수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어떤 규율 속에 자기를 묶어둘 수 없는 야생마와 같은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기질 때문인지 그는 튀는 행동을 했고, 무절제한 삶으로 인해 경기력은 떨어졌고, 사람들의 환호성은 비난과 냉소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거의 축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재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랜 방황의 세월을 청산하고 축구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살을 생각할만큼 절망에 빠졌던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자기를 믿고 곁에 있어준 팬들의 사랑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축구화 끈을 조여매는 느낌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통해 성숙해진 것입니다. 질책과 정죄가 아니라, 기다림과 용납과 사랑이야말로 생명의 모태입니다.

• 축복, 무엇을 위한?
사도는 가이오를 격려하면서 축복의 인사를 건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2)

이 축원문은 어느 유력한 교파의 강령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영혼의 평안’, ‘모든 일이 잘됨’, ‘건강’은 누구나 꿈꾸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속의 세상을 따라가느라 숨가쁜 우리가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내면에 고요함을 간직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내면의 고요함은 홀로 있는 시간, 즉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470장 1절)

주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시련의 현실을 외면한 우리 영혼의 잘됨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너’ 없는 ‘나’만의 행복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이란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던 이를 건져주기 위해 기꺼이 바지를 적시려 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친 이의 어깨를 토닥여 힘을 북돋고, 외로운 그의 곁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머물러 주어 마침내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희망의 미소가 돌아올 때 하늘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에게 유입되는 것입니다. 도쿄케이자이(東京經濟) 대학 교수인 서경식 씨는 교양이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과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영혼의 잘됨의 기반입니다. 너 없는 나의 행복이란 없습니다.

• 비움과 채움의 변증법
‘모든 일이 잘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실패를 바라고 어떤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뜻한 바를 이루기도 하고 실패의 쓴 잔을 마시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은 축원의 말로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사실 자체가 과욕입니다. 오래 전에 <보왕삼매론>을 보면서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열 가지 중에 두 대목만 소개합니다.

․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 일을 꾀하기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겹을 꺽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깁니다. 어려움은 우리를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닻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의 잘됨’을 돈벌이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파트 값이 오르고, 사놓은 땅값이 오르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아름다웠던 가족관계가 돈 때문에 깨지고, 조촐하고 평화롭던 마을 공동체에 돈이 유입되면서 이웃사촌이 원수로 바뀌는 일을 우리는 심심치않게 보고 있습니다. 욕망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욕망의 터전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한 우리는 늘 불안함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비움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쑤 비움 없이 채움을 추구합니다. 우리 삶에 평안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골프장 완비, 무료 강습”. 이것은 새로 짓는 아파트 광고에 나오는 카피가 아닙니다. 목동에 있는 어느 교회 차에 붙어 있는 홍보문구입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이 이 문구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래서 성장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예수님은 이런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일까요? 나는 우리 교우들이 하는 일들이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잘됨은 누군가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거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마지막으로 사도는 가이오의 건강을 축원하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에서 심심찮게 ‘9988’이라는 말을 봅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뜻이랍니다. 건강은 현대인들의 으뜸가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건강 문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건강이 무너지면 마음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정신의 일이라면서 몸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꾸지람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옵니다. 핑계할 말이 없습니다. 저와 만나는 이들마다 제 건강이 어떠한지를 묻는 데, 심지어는 선배 목사님들도 그렇게 물어 아주 송구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몸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내가 문제삼는 것은 건강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관심도 또한 문제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문장가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의 풍자시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말은 흔히 ‘건전한 신체’를 강조하는 말로 해석되고 있지만 사실 이 말의 원문은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할 일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탄식입니다.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건강에 자신이 있으면 사람은 허튼 짓을 하게 마련입니다. 찬송가 528장 3절에는 “주를 위해 살겠으니 나를 고쳐 주소서”라는 기원이 나옵니다. 진정한 건강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마음을 품는 데서 비롯됩니다.

누가 건강한 사람입니까? 몸은 건강하지만 그 건강 때문에 허튼 짓만 일삼는 사람은 사실은 병든 사람입니다. 몸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건강’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몸도 건강하고, 그 건강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역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삶의 속도를 낮춰야 합니다. 휴식없이 달려가는 삶이 우리를 안달하게 하고, 그 안달이 속병을 낳습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홀로 있음의 여백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그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의 힘이 우리에게 유입됩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거두어들임의 계절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일 내내 볼쇼이 합창단이 부른 H.R.Evans의 를 들으며 지냈습니다. 바리톤 솔로와 합창단이 주거니받거니 부르는 팔복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참 편해졌습니다. 삶의 근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나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은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른 이를 살맛나게 해주려고 몸을 낮추는 사람은 자기 생의 비애가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축복의 매개가 되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 디오드레베의 자리에서 벗어나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나 또한 사도처럼 우리 교회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 공동체를 싸늘한 신의 무덤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불꽃이 일렁이는 생명의 모태로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다른 이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행복을 맛보고, 주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마음을 품어 영과 육이 아울러 건강한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0월 14일 12시 32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