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2. 사람도 고향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하15:17-23
설교일시 2007/10/21
오디오파일 s071021.mp3 [675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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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고향이다
삼하15:17-23
(2007/10/21)

[왕이 먼저 나아가니,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은 ‘먼 궁’에 이르자, 모두 멈추어 섰다. 왕의 신하들이 모두 왕 곁에 서 있는 동안에,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이 왕 앞으로 지나가고, 가드에서부터 왕을 따라 온 모든 가드 군인 육백 명도 왕 앞으로 지나갔다.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장군은 우리와 함께 가려고 하오? 돌아가 있다고, 새 왕을 모시고 지내도록 하시오. 장군은 외국인이기도 하고, 장군의 본 고장을 두고 보더라도, 쫓겨난 사람이니, 그렇게 하시오. 장군이 온 것이 바로 엊그제와 같은데, 오늘 내가 그대를 우리와 함께 떠나게 하여서야 되겠소? 더구나 나는 지금 정처없이 떠나는 사람이 아니오? 어서 장군의 동족을 데리고 돌아가시오. 주님께서 은혜와 진실하심으로 장군과 함께 계셔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나 잇대는 왕에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잇대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먼저 건너 가시오.” 그리하여 가드 사람 잇대도 자기의 부하들과 자기에게 딸린 아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건너 갔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부하들이 모두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그의 부하도 모두 그의 앞을 지나서, 광야 쪽으로 행군하였다.]

• 조각 미남의 속내
요즘 젊은이들은 몸매가 좋은 사람을 가리켜 이기적인 몸매라고 하더군요. 정확하게 한정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느낌으로 그 속내를 알아차릴 수는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럽다는 말이지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서도 이기적인 용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셉, 모세, 다윗 등도 빼어난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이들입니다. 사라, 리브가, 라헬, 에스더 등도 아리따운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극찬을 받고 있는 조각 미남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미남은 없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삼하14:25-26)

마치 그리스의 조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스의 조각에 등장하는 이들은 신들이거나 전사(戰士. warrior)입니다. 기원전 4-5세기에 만들어진 아폴로 신상이나 아프로디테 신상, 전사상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像’이 오히려 너무 속물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스 조각에서 중요한 것은 비례와 균형입니다. 그것을 통해 신적인 질서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풍모는 신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풍부한 머리카락은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왕궁 저울로 1세겔이 13그램이니까 그의 머리카락 무게 200세겔은 약 2.6킬로그램이나 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한 마디로 압살롬은 젊고 아름답고 호기로운 청년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가 그의 사람됨까지 보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의 속에 도사린 것이 빛이냐 어둠이냐 입니다. 잘 생겼으나 천해 보이는 이가 있고, 못 생겼으나 고귀해 보이는 이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야심가였습니다. 그의 속에는 깊이 모를 어떤 심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이 동생을 겁탈했던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하고 달아났다가 몇 년의 객지 생활 끝에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만나주지 않자,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과 젊음을 야망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그는 전차부대와 기병부대, 그리고 보병부대를 양성하여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위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왕궁의 사법체제가 해이해지면서 힘있는 자들의 횡포가 커지고 억울한 이들이 늘어나자, 압살롬은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고 겸손한 말로 위로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히 젊고 매력적이고 따뜻하고, 낮은 데 처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압살롬에게로 쏠립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는 다윗 왕에게 헤브론에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많은 고관들을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는 측근들에게 나팔소리가 들리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지시해놓았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가담했고 그를 따르는 백성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압살롬은 마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을 타파하는 혁명가처럼 위풍당당합니다.

• 품이 넉넉한 사람
전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다윗은 역시 역전의 노장답게 상황판단이 재빠릅니다. 황급히 피신하면서도 그는 여러 가지 일들을 빈틈없이 처리합니다. 왕궁을 지키도록 후궁 열 명을 남겨 두고, 온 가족과 더불어 피신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 행렬이 ‘벳메르학’, 곧 ‘먼 궁’에 이르렀을 때 왕은 잠시 멈추어 서서 일종의 열병분열식(閱兵分列式)을 합니다. 왕과 동행한 군인들이라고는 몇몇 측근 장군들과 외국에서 온 용병들 뿐이었습니다. 왕의 행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처한 위기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급박한 상황을 전하는 성서 기자는 마치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블레셋 출신의 가드 군인 육백 명이 왕의 앞으로 지나갈 때 다윗은 그 사령관인 잇대를 불러 뜻밖의 말을 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있다가 새 왕을 모시라는 것이지요. 그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정이었을까요? 나는 후자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 잇대는 블레셋에서 쫓겨나 다윗에게 그 몸을 기탁하러 온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여 자기 수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그들은 또 다시 뿌리뽑힌 유랑민의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이 지난 날 유랑민으로 떠돌았기에 다윗은 유랑민들의 신산스런 삶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졌는데도 그는 다른 이의 고통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출23:9)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세상을 향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는 그런 토라의 구현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 리더십의 특성이기도 했습니다.

• 바위와 소나무
오늘 주보에 박남준 시인의 <아름다운 관계>라는 시를 올려놓았습니다. 시인은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 바위에 식물이 자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바위는 애초에는 이끼조차 살 수 없었고, 날아온 풀씨가 어렵게 싹을 틔워도 곧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불모의 바위였습니다. 그런 바위가 소나무를 키우다니 어찌된 일인지요? 시인은 그 놀라운 기적은 바위가 늙어 품이 넉넉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품이 넉넉해지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이끼와 마른 풀들 사이에 떨어진 솔씨 하나가 날아와 안기자, 바위는 그 작은 것을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 사랑으로 바위는 소나무를 키웠고, 소나무는 마침내 푸른 그늘을 드리웠고, 또 새들을 불러 노래하게 했습니다.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이것은 시인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독자인 우리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몸의 한켠을 헐어 누군가의 품이 되도록 해준다는 것,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이 있을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 주님의 삶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나’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 사람을 얻은 자의 행복
진정 어린 다윗의 말에 잇대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여기서 말은 소통의 매개일 뿐, 저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는 하나님과 마음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내어 올리는 기도이든, 명상 기도이든, 깊은 관상에 들든 그 근본은 하나님과 통하려는 것입니다. 잇대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임금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 진심은 진심을 부릅니다.

나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사람도 고향이다>라고 잡았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 유년 시절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곳도 고향이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우리의 고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의 마음이 각박한 까닭은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 삶을 황무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 계신 도정일 선생은 현대 한국인을 나포(拿捕)하고 있는 정신상태(mentality)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공포의 문화입니다. 일종의 두려움과 불안 의식인데, 특히 1997년의 금융위기 시기를 지나면서 생긴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늘 고용 불안, 비장규직의 일반화, 실직의 위험, 사회적인 열패자로 전락할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마음조차 을씨년스럽게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겨울 공화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망(羨望)의 문화입니다. 세상이 불안정해질수록 사람들은 극적인 인생역전을 꿈꿉니다. 로또 열풍이 그것입니다. ‘뜬다’는 말 한 마디가 이런 풍조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매스컴은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과 물질적인 성공을 거둔 소수의 사람들을 영웅으로 포장하여 내보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처럼 되지 못하면 무능력자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얼굴을 뜯어고치고, 학력을 위조하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선망은 영적 빈곤의 증거입니다. 내적인 빈곤함을 채울 길 없으니까 외적으로 치장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허영과 천박함이 우리 시대의 표징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 기독교인의 새 이름
본디 마음을 잃어버린 채 우리는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영락없는 나그네요, 쫓겨난 자입니다. 잇대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잇대에게는 부하들과 식구들이 안심하고 살만한 땅과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살아야 할 이유였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잇대에게 살 이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궁극적인 삶의 이유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권력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사람을 잃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불의를 보면서도 침묵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는 말의 참뜻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든 주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의 품이 되어 주십니다. 인내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의 손과 발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잇대와 다윗 사이의 감동적인 대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행렬이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행렬은 광야 쪽을 향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향과 함께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다윗의 진정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의 고향이 되어 살고 계신지요? 마음 한 켠을 열어 가슴 시린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품어주고 계신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고향이 되어 주는 사람, 기독교인의 새 이름입니다. 이름과 실체가 오롯이 하나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0월 21일 13시 27분 4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