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3. 엎드림으로 일어서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겔22:23-31
설교일시 200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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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림으로 일어서라
겔22:23-31
(2007/10/28, 종교개혁기념주일)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유다 땅에 이렇게 말하여라. '유다 땅아, 너는 진노의 날에, 더러움을 벗지 못한 땅이요, 비를 얻지 못한 땅이다. 그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은 음모를 꾸미며, 마치 먹이를 뜯는 사자처럼 으르렁댄다. 그들이 생명을 죽이며, 재산과 보화를 탈취하며, 그 안에 과부들이 많아지게 하였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나의 율법을 위반하고,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더럽혔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깨우쳐 주지도 않으며, 나의 안식일에 대하여서는 아주 눈을 감아 버렸으므로, 나는 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였다. 그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도 먹이를 뜯는 이리 떼와 같아서,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시켰다. 그런데도 그 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주며, 속임수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들에게 거짓으로 점을 쳐 주며,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나 주 하나님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전한다. 이 땅의 백성은, 폭력을 휘두르고 강탈을 일삼는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을 압제하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고, 내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켰다. 나는 그들의 행실을 따라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 주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 이웃에게 길을 묻기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개신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모임이 지난 한 주간 동안 열렸습니다. 제2회 교회의 날 행사였습니다. 화요일에는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이웃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의 모임이 있었는데, 개신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청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직접 그 자리에 가지는 못했고, 행사 본부에서 보내주는 요약문만 읽었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새겨들어야 할 만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개신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한결같이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기름지다’, ‘느끼하다’를 비롯해 ‘부시의 아류 같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례하고 천박하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르면서, 늘 남을 가르치기 좋아한다.”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 예컨대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병실에 심방 온 이들이 다른 환자들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큰소리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심지어는 사찰 마당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좋게 보면 신앙의 열정이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몰염치이고 몰상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 사실 신앙적 삶이란 지배의 포기에 있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간다는 것이지요.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가차 없이 정죄하고, 때로는 불상에 낙서를 한다든지 단군 像을 자른다든지 하는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고도 지적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 하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을 억압하거나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못하고 있음에 대한 고발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깊은 친교를 나누고, 애찬을 나누고, 기도에 힘쓰고, 서로의 필요에 응답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찌나 좋았던지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도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호감은 매력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매력에 이끌려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개신교회의 현실은 정 반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이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만, 종교개혁은 다른 것 없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오셨던 정희수 감독님은 이것을 “깊이 파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deep run", 깊이 흐르라는 말이겠지요. 우리 삶이 좀 깊어져야 합니다. 이 시대정신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흐름을 타고 살아야 합니다. 피상적인 데 머무는 한 우리는 매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 부적절한 관계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당하는 전후의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의 멸망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정치 외교적인 문제, 국제정세의 변동이라는 원인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그런 외적인 이유 말고, 더 근원적인 데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타락, 바로 그것이 유대 멸망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드러난 병’은 그가 살아온 생활 방식과 마음가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이 먼저 탄핵하는 이들은 예언자와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흔들어 깨워 진실을 바라보도록 하고, 소명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보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할 때 예언자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예언자는 기존 질서의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인기 있을지 몰라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가신 존재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시대의 성전 예언자들은 ‘아니오’ 보다는 ‘예’라고 말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먹이를 뜯는 사자처럼 백성들을 죽이고, 불의의 이득을 취할 때 성전 예언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회칠하여 덮어 주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합리화하여 주었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들도 그런 종교인들이 좋았겠지요. 일종의 야합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고 외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의를 합리화하여 주는 종교는 이미 죽은 종교입니다. 에스겔은 타락한 예언자들의 행태에 대해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주며, 속임수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들에게 거짓으로 점을 쳐 주며,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나 주 하나님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전한다.”(28)

종교와 정치는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유착하는 순간 정의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 앞으로 소환해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이 이처럼 거짓말쟁이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물질과 권력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돈과 영향력의 확대는 종교인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게 마련입니다. 돈이라는 독, 권력이라는 독을 마시면 해독제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부시의 아류같다’는 지적은 교회의 이런 면과 연관된 것일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이익에 눈이 멀 때 소위 예언자라는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마치 먹이를 뜯는 사자처럼 으르렁대며, 사람들 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어 자기의 먹잇감으로 삼습니다.

• 분별력 잃은 사람들
에스겔은 제사장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향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서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경계선에 선다는 것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외로운 거지요. 그런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가리켜야 합니다.

물론 거룩함과 속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것도 아주 속될 수 있고, 속되어 보이는 것도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탐욕을 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세리와 창녀에게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습니다. 제사장은 그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율법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에스겔 시대의 제사장들은 율법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해석하고, 거룩한 삶과 속된 삶의 경계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적 종교 행위에는 열심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적인 종교 즉 사람을 사람답게 변화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신앙은 ‘변화’(transformation)를 본질로 합니다. 수십 년을 믿어도 여전히 옛 삶의 관성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속 좁고, 이기적이고, 사납고, 비겁합니다. 지도자들의 죄가 큽니다.

에스겔은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백성들이 죄짓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과 배려가 토라의 핵심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압제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백성들은 나그네를 따듯하게 맞아들여 대접하는 전통조차 버리고 오히려 나그네를 학대했습니다. 폭력과 강탈이 일상화되었던 것입니다. 남들에 대해서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개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텅 빈 속을 채울 길이 없을 때 사람들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향할 때는 자학이나 자살로 발전하고, 타인을 향할 때는 폭력으로 발전합니다.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은 무정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 지경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치면서 다른 이들과의 연대의 감정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애린(愛隣)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살덩이로 전락하고 맙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하나도 속상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이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람다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이 야수들의 각축장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불화하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려고 땀 흘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이들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은 격노의 불길을 땅 위에 쏟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고 애통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다가 고난 받는 사람들을 주님은 어여삐 여기십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단어 ‘테수바 teshuvah’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섬’이고, 다른 하나는 ‘대답’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돌아서는 것입입니다. 회개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돌아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소리는 부드럽지 않습니다. 거칠고 차갑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품에 쓰러졌던 탕자처럼, 우리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무정해진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쾌락을 구하느라 팔아먹어 텅 비어버린 우리 마음을 고쳐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낮아져 엎드리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가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고쳐주시기 위하여
슬픔으로 때려 상처를 내시며,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우리를 죽이십니다.

진정한 종교 개혁은 제도 개혁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생명의 방향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은 불신의 표징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시작하셨으니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꿈에 동참할 뿐입니다. 성벽을 쌓고, 성벽의 타진 틈에 서서 당신의 진노의 팔을 붙잡아 줄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 앞에 우리를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보물’로 여겨주십니다(출19:5). 주님께서 보물로 여겨주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0월 28일 12시 36분 5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