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4. 깊은 감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후1:11-12
설교일시 2007/11/04
오디오파일 s071104.mp3 [5547 KBytes]
목록

깊은 감사
살후1:11-12
(2007/11/4)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 아무 것도 당연하지 않다
모처럼 어린이들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못 생긴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봐도 즐겁다는 데, 제 마음이 참 흐뭇하고 좋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시리라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게 뭐가 있을까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들판, 탐스럽게 익은 과일, 설악산의 단풍…어떤 분은 교회에서 먹는 시루떡을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추수감사절은 풍요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제게는 복음성가인 <오 신실하신 주>가 떠오릅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 보아도/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확신하는 이들의 삶은 든든합니다.

어쩌면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 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 사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감사’라는 한 단어 속에 다 우겨넣을 수 없는 삶의 경험들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조금만 정직하게 우리 삶을 돌아보면 감사의 심정에 북받쳐 살기보다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현실이 그렇다고요? 글쎄요. 사실 우리 삶은 풍요롭습니다.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엄마나 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가족들의 등교와 출근 준비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엄마나 아버지가 일터에 나가 속을 다 빼놓고 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엄부렁하다’는 말을 아시는지요? 속은 비고 겉만 부푼다는 말입니다. 야무지게 묶어놓은 볏단에서 볏줄기 몇 가닥씩 꺼내 쓰다보면 그만 속이 헐렁해지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어른들의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희어지고, 머리숱이 줄어드는 것은 속을 빼놓고 살아온 결과일 겁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무능해도 부모라고 인정하고 따라주니 고맙지요. 교인들이 부족한 목사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참아주는 것도 고맙습니다.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할 일이 있다는 것,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삶이 사랑의 빚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이요, 누군가의 희생 덕분입니다.

• 깨진 항아리라 해도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당신의 손과 발이 되라고 초대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 덕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주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있어라” 하심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 존재의 뿌리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 불러내신 까닭은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사람입니다. ‘생명’이라고 말할 때 ‘生’은 풀이 자라는 것처럼 자연적인 생장을 뜻합니다. 이건 뭐 반성을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삶입니다. 그런데 ‘命’은 좀 다릅니다. 이 글자는 禮冠을 쓴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귀 기울임이 있어야 하고, 그 명을 수행하기 위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사람은 ‘생’으로서의 자연적 삶과 ‘명’으로서의 의지적 삶을 결합할 때 비로소 사람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은 나이 오십을 가리켜 ‘知天命’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이 서른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요6:38b). 예수님이 파악한 하나님의 뜻은 간결합니다. 세상에서 당신과 인연을 맺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이 영생을 얻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이 마음으로 대한다면 불화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와 갈등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삶을 뜻합니다.

늘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안달하고 조바심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느긋합니다. 캐나다에 계신 김광수 목사님이 회갑을 맞아 내신 책 제목은 <>입니다.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안달하지 말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바로 그런 존재가 되라, 다른 무엇을 하려고 조바심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일 겁니다. 목사님은 스스로를 “깨진 항아리”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깨진 항아리는 물을 담거나 옮기는 일에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깨진 항아리에서 새어나온 물을 통해 길가에 있는 풀들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움과 허물까지도 받으셔서 구원의 현실을 이루어내십니다. 바울 사도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살후1:11b)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일을 완성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형편없이 그려놓은 그림에 유영남 권사님이나 조항범 집사님, 곽권희 집사님이 손을 대면 전혀 다른 그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를 만들 때 우리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 영광에서 영광으로
여퉈 두었던 짜투리 천을 가지고 멋진 조각보를 만들고, 깨진 박을 버리지 않고 기워서 사용하는 알뜰한 옛 여인네들들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고쳐가며 사용해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11:30) 바울 사도의 이 말에는 전혀 가식이 없습니다. 제가 과거에 공부했던 세례문답집의 첫 번째 질문 “사람의 으뜸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나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도록 산다는 것 아닐까요? 바울의 말로 하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사는 것이 되겠네요.

100주년을 향해 가는 우리 교회도 산 위의 마을처럼 세상에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번 주중에 청파햇빛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지붕 위에 세워진 햇빛 발전소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교회가 앞장서 무공해 청정 에너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한 시대사적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햇빛 에너지가 모듈을 거쳐 직류 전기로 바뀌고 그것이 인버터를 거치면서 교류 전기로 전환되는 과정이 참 신기합니다. 저는 엊그제부터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햇빛이 좋을 때면 일을 하다가도 밖으로 달려나가 전력 생산을 보여주는 계기판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질서보전을 위한 작은 창문 하나를 열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교회들이 이런 실천의 길에 접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인들의 믿음이 성숙을 향해 확고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주는 일도 저의 기대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임원회에서는 아주 의미있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11월 둘째주 주일헌금을 소말리아에서 피랍된 어부들을 돕는 데 사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임원들은 만장일치로 그 제안을 승인했습니다. 저는 임원들의 얼굴에 어렸던 안타까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조금씩 세상에 있는 약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는 일에 눈을 떠가고, 구체적인 실천의 자리에 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애쓸 때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음을 기뻐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좋은 날 피상적인 감사에 머물지 말고, 우리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깊은 감사의 찬양을 주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1월 04일 12시 31분 21초